삶은 늘 꽃을 피우는 일이 아니라도 괜찮다.
제주 여행 중.
수목원을 방문하다.
화려한 동백꽃과 비움의 배롱나무를 만나다.
하나는 타오르며 말하고, 다른 하나는 버티며 말한다.
며칠 째 눈발을 실은 제주도 겨울바람이 창을 두드리며 우리를 실내에 붙들어 두었다.
도서관에서 책장을 넘기며 시간을 보냈지만, 활자는 몸의 활기까지 보살피지 않는 듯했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인지 몸은 무겁고 둔했다. 몸이 멈춰있으면 마음까지 함께 굳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밖으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어디든 천천히 걷고 싶어진다. 산책은 가라앉은 분위기에 변화를 주는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물론, 날씨가 허락해야만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느 포근한 겨울 오후, 따뜻한 햇살이 서둘러 밖으로 나오라는 듯 재촉하고 있었다.
햇살과 달리 바깥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다행히도, 차가운 바람은 날카롭기보다는 상쾌함에 가까웠고 햇살과 어우러져 오히려 몸을 깨우는 기운으로 다가왔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는 해안길 대신, 중간산 수목원 숲길이 더 나은 선택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수목원으로 발걸음을 정했고, 목적지는 자연스럽게 상효원으로 향했다.
우리(집사람과 나)가 수목원에 도착했을 때, 겨울이 내려앉은 수목원에는 예상과 달리 바람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숲 속 그늘진 흙 위, 얇게 내려앉은 눈은 차가운 빛으로 옷깃을 여미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땅은 차가웠고, 주변 공간은 깊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새소리조차 그 적막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겨울은 정원의 색을 덜어내고 있었다. 전체적 색깔을 무채색으로 단순하게 만들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와 정적 속에,
나무, 숲, 그리고 우리와 시간만이 한 자리에 놓여 있는 듯했다.
수목원 내에는 여러 개의 테마정원이 조성되어 있었고, 조용히 사색하기에 더없이 알맞은 공간이었다.
테마에 따라 다양한 나무와 꽃들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꽃들은 각자 이름표만 가슴에 달고 있었다.
가지런히 서 있는 그 표식들은 짙은 흙의 기운을 모으며, 다가올 계절을 준비하는 듯했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 생은 그 아래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언덕 위 대나무 숲에 들어서자, 바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르락 사르락 댓잎을 스치던 바람은 이내 쏴아 하고 파도처럼 밀려왔다. 두 팔을 벌려 그 흐름을 마주하자, 몸이 가벼워지며 연처럼 떠오를 것 같은 기분이 스쳤다.
삼나무 숲에 이르자 공기가 달라졌다.
피톤치드 향이 먼저 다가왔고,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서늘하고 맑은 기운이 폐 깊숙이 스르르 스며들었다.
오래 묵은 생각의 먼지가 조용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향은 말없이 몸을 지나 마음에 닿고 있었다.
그때 작은 곤줄박이 한 마리가 가까이 내려앉아 재잘거렸다.
무언가를 전하듯 머물던 녀석은 이내 수줍은 듯 포르르 날아올라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 작고 앙증맞은 움직임에, 이유 없이 미소가 번졌다.
걷는 사이, 몸이 풀리는 것을 넘어 마음까지 맑아지고 있었다.
차가운 계절 속에서 오히려 더 또렷해지는 감각들,
그 속에서 몸은 조금씩 가벼워지고, 마음도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과 깊은 정적 속, 한쪽에 동백꽃이 붉게 피어 있었다.
겨울을 부정하는 듯 만개한 꽃잎은 마치 얼어붙은 세계에 반항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화려한 붉음은 소리 없이 주변을 강하게 흔들고 있었다.
흑백사진처럼 단순한 겨울 풍경 속에서, 동백꽃의 색은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고 선명했다.
그 느닷없는 등장에 시선이 멈추었고, 감각이 잠시 멈추었다. 모든 것이 움츠러든 계절에 홀로 화려하게 피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인상은 충분히 낯설고 강렬했다.
우리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처음의 놀라움은 조금씩 다른 결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화려함은 차분한 고요함으로, 낯섦은 당당함으로 바뀌었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 미묘한 온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동백나무 아래에는 이미 떨어진 꽃들이 붉은 자국처럼 흩어져 있었다.
한때 가지 위에서 단단히 피어 있었을 것들이, 이제는 조용히 땅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화려함은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 풍경 앞에서 문득 생각이 머문다.
피어 있는 순간과 떨어진 이후의 시간, 그 사이를 우리는 어떻게 지나가고 있는지.
빛나던 자리와 내려앉은 자리 사이에도, 여전히 삶은 흐르고 있는지.
이 모습은 우리 삶에서 성공과 행복, 그 끝에 대한 사색의 화두와 울림을 던져 주고 있었다.
정원의 다른 쪽에는 배롱나무가 서 있었다.
잎을 모두 내려놓은 줄기와 가지들은 뼈대처럼 드러나 있었다.
짙은 갈색으로 거친 질감의 유화를 그리면 좋겠다는 상상을 잠시 해 보았다.
가늘고 긴 선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지만, 그 끝에는 아무것도 매달려 있지 않다.
여름 동안 무성했던 흔적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줄기와 가지의 거친 선들 뿐이다.
드러난 골격은 숨길 것이 없었다.
결핍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본질에 더욱 가까워진 상태이기도 해 보인다.
무엇을 붙들고 있지 않기에, 오히려 더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처럼 보인다.
내려놓음의 형상에 가깝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릴 뿐, 소리도 나지 않는다.
적막감도 나무의 일부처럼 아주 자연스럽다.
배롱나무 앞에서, 문득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스민다.
쓸쓸함과는 조금 다르다. 무너지지 않고 버텨온 날들의 표정 같은 것.
다 비우고 제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묵직하다.
침묵이 곧 공허는 아니라는 듯, 배롱나무는 한 여름 개화시기가 되면 어는 나무보다도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이다. 그 꽃이 백일을 간다 하여 백일홍이라고도 불린다는 사실이 지금의 비움, 혹은 내려놓은 상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무엇이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것을 존재한다고 인식한다.
겨울의 배롱나무는 가장 솔직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덧붙은 것을 제거하고, 골격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상태.
그것은 외적 빈곤이 아니라 내적 충실이며, 결핍이 아니라 정직에 가깝다.
동백나무가 ‘지금’을 살아내는 얼굴이라면, 배롱나무는 ‘지나온 시간’을 드러내는 몸이라는 생각이다.
한 계절을 온전히 비워낸 자리. 무엇을 견뎌냈는지는 분명히 느껴진다.
그 벌거벗은 줄기와 가지에는 초라함보다 당당함의 무게가 배어 있다.
겨울 수목원은 동백나무와 배롱나무, 이 둘을 한 화면에 올려두었다.
붉게 타오르는 것과 비워둔 채 서 있는 것.
하나는 피어남으로 말하고, 다른 하나는 비워둠과 견딤으로 말하고 있었다.
동백이 ‘지금 피어 있음’의 존재라면, 배롱나무는 ‘여전히 서 있음’의 존재다.
하나는 현재의 밀도를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지속의 무게를 보여준다.
우리는 보통 화려하게 피어 있는 상태를 삶의 중심에 두는 것 같다. (성취, 성공, 환희, 그리고 드러남)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생각과 달리 우리들의 삶 대부분은 어쩌면 동백보다는 배롱나무에 더 가깝지 않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이는 시간과 잎이 없는 계절들, 그럼에도 꿋꿋하게 견디어 나가는 날들 말이다.
살아간다는 것이 늘 꽃을 피우는 일만은 아니다.
때로는 잎을 내려놓은 채 서 있는 시간 또한 필요하다.
이 두사실을 이 수목원 풍경이 먼저 알고 말해주는 듯하다.
겨울 수목원은 두 가지 방식의 존재를 나란히 둔다. 피어남과 비워냄.
그러나 이 둘은 대립이 아니라 순환에 가깝다.
동백나무 또한 언젠가는 잎을 떨굴 것이고, 배롱나무 또한 다시 무성해질 것이다.
차가운 겨울 수목원 숲 속, 동백과 배롱나무가 말없이 조용한 삶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하나는 타오르며 말하고, 다른 하나는 버티며 말한다.
삶은 늘 꽃을 피우는 일이 아니라,
때로는 아무것도 피우지 않은 채로도 무너지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