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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웨지감자 Jun 06. 2023

정신건강 실태조사

마음건강 성적표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2023년 5월. 나는 교내 학생상담센터에서 발송된 정신건강 실태조사 참여 메일을 받았다. 2023년 6월이 되어 브런치를 쓰는 지금의 나는 상당히 마음이 건강한(?) 상태지만 불과 한 달 전의 나는 몸과 마음이 전부 만신창이었다. 외풍을 맞아 처참하게 너덜너덜했다. 아직 글로는 쓰고 싶지 않은 아주 많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감정의 폭풍을 온몸으로 부닥친 뒤 소강상태로 들어가던 차에 메일을 받은 것이다.


나는 학부생 시절부터 정신건강 실태조사에 꾸준히 참여해 왔다. 나의 에너지가 대부분 스스로의 내면을 향해있는 까닭이었다. 나는 항상 조심스레 내 마음에 다가가 내 감정에 대해 살피곤 했는데 가끔은 나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조용히 물들어가는 마음도 존재했다. 그래서 나는 현재 나의 상태를 설명해 주는 어떤 객관적인 지표가 필요했다. 그것이 가끔은 외면하고 싶었던 사실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하더라도 말이다.






유난히 더웠던, 그 5월의 어느 날에 나는 온라인으로 설문에 참여하면서 결과가 엉망일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흠. 내가 생각해도 내가 고르는 선택지들은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고를 것이 아니었다.


실은, 1-2주만 더 있으면 나는 완전히 회복되어 이런 응답을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가상의 내가 고를 선택지가 눈에 아른거렸지만...

에라 모르겠다! 오늘의 나는 그래, 좀 아플 수도 있는 거지.


그래서 한 달 후 내가 받아 든 그날의 성적표가 이 모양이다.


중증도 우울 94.9%

중증도 불안 95.5%

지각된 스트레스 90%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 든 나는 너무 기가 차고 우스워서 깔깔 웃었다.

그래 세상아. 나는 그때 진짜 아픈 게 맞았다니깐? 이 결과를 봐. 나는 진짜 힘들었어.


연구실 사람들에게 나는 보란 듯이 성적표를 들이밀었다.

- 여기 보세요. 여러분. 여기 아픈 사람이 있다니깐요?


그러자 연구실 선배는 씩 웃으면서 자기 결과야말로 진짜 대박이라면서 나를 도발했다. 나는 당장 노트북을 가져와 서로의 결과를 비교했다. 선배는 나에 못지않게 가슴 아픈 심리검사 결과지를 보여주었다. 서로 더 나쁜 점수와 좋은 점수는 갈렸지만 정말 막상막하, 용호상박, 자웅을 겨룰 수 없는 결과였다.


이 <누가 누가 더 심리검사 결과가 나쁜가> 대결을 지켜보던 다른 연구실 동료의 웃음이 정말 웃음이었는지 안타까움이었는지.






어떤 마음은 수치화되어야 비로소 알아차린다. 부정적인 감정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학생상담센터에서 정신건강을 조사하는 것 같았다.


나는 오직 나의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나 이외의 사람은 어떻게 세상을 경험하는지 알 수 없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서 짐작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몹시 힘들었는데, 당신들도 그렇겠지요? 당신도 나와 같은 상황에서 이렇게 힘들었나요? 나는 나의 마음으로 세상을 재단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의심한다.

사실 이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쉽게 넘어가는 고비가 아닐까? 나의 괴로운 감정은 실은 <정말로 괴로운> 것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아주 쉽게 나의 힘듦과 괴로움을 의심한다.


정신건강 실태조사 결과 혹은 전문가의 말을 통해서 확인을 받은 후에야 나는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람들을 줄 세워 얻은 <객관적인> 결과를 마주하고서야 아픔을 인정하고선 안도한다. 낙제점을 받은 결과지를 보고선 웃음이 터져버린 이 마음은 어디에서 왔을지 궁금하다.


그래도 나는 대학원에 들어와서 나에게 관대해지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아팠던 것은 그저 투정이나 꾀병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사 남에게는 한번 넘어진 적도 없는 고난 같지 않은 고난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진실로 괴로워했다는 것을.

그런 것을 이해하려고 했을 때, 나는 내 마음을 의심하지 않고 나에게 더 친절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간 더한 고비가 와서 지금의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해도 지금 내가 힘든 것이 거짓이 될 리 없다.






이런 건 어느 날 잠에서 깨면 뿅 하고 깨달을 순 없는 걸까? 이렇게까지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후에야 알아차리는 스스로가 가소롭기도 하다.


기대와 실망과 인내와 조급함의 감정지옥에 갇혀 뺑뺑 돌고만 있는 대학원에서 나름대로 착실하게 살아남으려고 하는 중이다. 이러다가 졸업할 때쯤에는 정말로 득도할지도 모르겠다. 너는 모두 깨우쳤으니 하산하도록 해라,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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