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연구실에는 긴장이 돈다. 매년 가는 해외 학회 포스터 초록 제출 시즌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학회에 포스터를 내고 싶은 학생들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결과를 내고자 말없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밤늦게까지 아무 소리 없이 자판만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에 나도 끼어 있다.
비록 작고 부족한 연구 성과라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작년에 참석했던 해외학회에서 마주쳤던 멋진 연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피드백을 받고 싶었다. 그들 눈에도 내가 좀 괜찮은 대학원생처럼 보이길 바랐다. 그래서 이왕이면 지금보다 괜찮은 결과와 멋진 그림을 들고 가고 싶었다. 이 연구가 내 눈에만 괜찮아 보인다는 게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나는 다행히도 지도 교수님께 1차적으로 피드백을 받아 학회 제출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 단계에서 스스로 연구 결과가 부족하다고 느껴 준비를 포기하는 학생들도 다수 생겼다.
나는 자주 12시가 넘어 퇴근했다. 나는 다 계획이 있었다. 생각대로만 착착 단계가 전개된다면 꽤 스토리 있는 연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과가 생각처럼 잘 나와 주지 않았다. 매일매일 "내가 너한테 못해준 게 뭐야"라고 말하면서 컴퓨터 멱살을 짤짤 흔들었다. 구글 스칼라로 들어가서 논문을 이 잡듯이 뒤지고 혹시 내가 계산 실수라도 했나 몇 번이고 코드를 들여다봤다.
야속하기도 하지.
내 마음고생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결과는 내 맘같이 나오지 않았고, 나는 결국 준비하던 마지막 단락을 다시 다 지우고 초록(abstract)을 작성하게 되었다. 내가 그토록 많이 머리를 쥐어뜯었건만... 지독한 짝사랑은 현재진행 중이다.
어쨌든 마감일까지 초록 제출은 해야 했다. 부족한 영어 실력과 그림 실력으로 크로스첵(cross check)을 했다. 동료들에게 내 초록 파일을 보내면서도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몸 둘 바 몰랐다. 이런 걸 학회에 내도 괜찮을까, 하며. 내 착하고 순한 연구실 동료들은 "뭐야, 생각보다 잘했네. 괜찮은데?"라고 말했지만 그들이 보내준 내 파일에는 빼곡히 수정 권고 메시지들이 작성되어 있었다.
초록 제출 마지막 날, 나는 심신이 쇠약해져서 예정보다 일찍 집에 갔다. 마지막으로 결과를 더 분석해 보고 절망으로 가득 들어찬 마음이었다. 이제는 "이제 와서 뭐 어쩔 건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하고 싶었는데, 잘하고 싶었는데. 복잡한 머릿속에 속이 메스꺼웠다. 헛구역질을 몇 번 하면서 지친 몸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함께 사는 동생에게 "아이고 힘들다"라는 말만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언제나 나를 가장 괴롭히는 건 스스로에게 거는 높은 기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감 하루 전에 지도 교수님께서 모든 파일을 확인해 보시고 일괄적으로 제출하셨다. 어쨌거나 나는 해외 학회를 준비하게 되었다. 너무 아쉽고 분하고 오기가 생겼다.
- 초록은 이렇게 제출했지만 포스터 때는 두고 보자.
마치 패배한 채 물러가는 악당처럼, 이번엔 방심했지만 다음에는 어림도 없다! 같은 대사를 마음으로 되뇌었다.
나는 다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는 이 계획대로 되기를 바라면서 다시 연구에 매진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