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가 떠오른다. 헤세라는 거대한 산에 자신만의 길을 찾은 54명의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헤세가 그들 정신에 준 영향을 들려준다. 대학시절 필수 고전이라 꾸역꾸역 참고 읽었던 헤세의 작품들이 그땐 뿌연 안갯속을 걷는 기분 같았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싯타르타>, <데미안>, <유리알 유희>, <수레바퀴 아래서>..... 헤세의 인생관과 세상을 바라보는 그 만의 방식이 녹아든 책들이다. 다시 헤세의 작품을 그것도 데미안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무언의 의무감마저 들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은 1919년 발간된 헤세의 데미안 100년 기념을 위해 3년 전에 출간된 책이다.
저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마치 장님이 한 부분 한 부분 조각들을 붙여 끝내 완전한 물체의 모습을 알게 되는 느낌이다. 헤세는 시인이 되고자 많은 시를 세상에 탄생시켰고, 소설을 썼으며 3,0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으며 자연을 사랑한 사람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반전쟁에 관한 자신만의 외침으로 독일 사회에서 철저하게 냉대받았던 인류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194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어도 그의 조국 독일인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고 한다. 헤세는 전쟁을 민족 국가들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하나의 문명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 파괴적인 내전이라 했다고 한다. 만년을 스위스에서 보내면서 삶의 깊이를 탐구했으며 그가 쏟아낸 책들이 수십 년이 지나 미국 히피족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책은 헤세의 시로 시작한다. 인생에 대한 헤세의 생각이 담긴 구절을 보며 한참을 붙잡고 있었다.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고, 인생에 주어진 권리는 나를 찾아 살겠다는 권리이며, 인생에 주어진 책임은 그저 사랑하라'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인생에>라는 시가 가슴에 와닿는다.
고봉수 영화감독이 위기의 상황에 떠오른 헤세의 말도 삶의 좋은 조언이 될 듯하다. '당신이 등지지 않는 한 운명은 당신이 꿈꾸고 있는 대로 고스란히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
김경주 시인의 헤세 이야기도 잔잔한 웃음을 이끈다. 교과서나 참고서에는 슬픔이 담겨 있지 않아 헤세를 읽었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는 슬픔 또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말하며 데미안이라는 책을 차가우면서 뜨거운 정념의 책이라고 부른다. 그가 헤세의 책을 통해 발견한 한 줄의 글, '나는 나를 가두기에 좋은 감옥을 내 몸에 가진 기분이었다'라는 표현이 독특하다.
데미안의 구절을 이야기하는 저자들을 통해 내가 읽어 냈던 데미안을 애써 기억해보려 노력했지만 이미 기억의 뒤안길에서 사라져 버린 것 같아 못내 아쉽다. '새는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 락 사스'
김경집 인문학자가 들려주는 헤세의 데미안은 깊이가 있다.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소설은 세상을 바라보는 멋진 창이었다'라는 말을 통해 헤세가 그의 유년기 시절의 창이 되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시절 나는 어떤 창을 갖고 있었던가. 데미안을 통해 '너만의 길을 가라'는 외침을 들었던 그는 분명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 같다. 겉으로의 나와 내면의 나는 외면하기도 하고 가끔 일치하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하고 무수한 작별을 통해 끝내 하나로 환언됨을 이야기한다. 그가 소개한 헤세의 인용글도 좋다. '우리가 보는 것들은 우리 내부에 있는 것과 똑같은 것들 뿐이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현실 외에 그 어떤 현실도 존재하지 않아. 바로 이런 이유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비현실적인 삶을 살고 있는 거야.' 데미안이라는 책을 한때 만나는 간이역 같은 책이 아니라 한평생 자신의 삶이 타성에 젖을 때마다 꺼내 '영혼을 말리는 건조대'로 삼아야 한다고 한다. 그의 말처럼 나 또한 이제 또다시 데미안을 읽을 시간인 것 같다.
김기봉 경기대 사회학과 교수가 발견한 헤세의 한 줄 글도 인상 깊다. '기차가 터널 속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의 삶은 제각기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세종문화 회관 사장 김성규 저자가 말하는 헤세의 메시지는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한국 지식인 협회 중앙회 회장인 김종백 저자의 헤세의 한 줄글도 마음에 든다. '자기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영웅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진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영웅이다..... 중요한 일은 자기에게 부여된 길을 한결같이 나아가고, 그것을 다른 사람의 길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사진 작가 김홍희 저자가 말하는 헤세의 이야기도 감흥이 된다. '신은 절대적 언어로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은 상대적 언어로 세상을 이해하며, 언어의 초월로 신에 이른다. 당신에게 데미안이 있는 한 당신은 언제나 에밀 싱클레어이다.'
은유와 마음연구소의 대표 명법이라는 저자는 헤세를 통해 '엄청난 집중력으로 자신을 직시하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어놓는 파문을 일으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헤세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을 던져 준다.
캠프 나비 대표 박상설 저자는 이야기한다. '세계를 깨트리고 나에게로 날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자신만의 삶을 누릴 수 있다. 삶이 심연에 던져진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목표를 향해 노력한다. 인간은 서로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각자가 지닌 고유의 뜻을 아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다. 인간이란 본래 자신의 고유한 모습, 내면 속에서 솟아나는 바로 그것으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만이 진정한 자유고, 그 자유야 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뮤지컬 프로듀서 송한샘은 데미안이라는 책을 이렇게 표현한다. '중학시절은 읽고도 몰랐고, 대학 시절은 머리로 웃었고, 중년인 지금은 마음이 아리다.'
중앙대 독문학과 교수인 오성균 저자가 발견한 데미안의 한 구절 해석도 기억에 남는다. 데미안의 아브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인 신이다.' '선악의 극단 논리에 초연해지면서 이제 마음속 깊이 흐르는 어두운 강물 소리를 관조할 수 있는 내면의 평화를 얻는다.' 이는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과의 합일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극 평론가 유민영 저자는 이야기한다. '이 땅에 살아가려면 독일 병정 같아야 하는데 헤세 덕분에 애당초부터 싹수가 노란 중도 속한 이도 아닌 어정쩡한 느린뱅이가 되어간 것이다.'
피아니스트 임현정의 상상력이 함께 상상하게 만든다. 지구상에 모든 지구인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국적이라면 헤세가 말한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라는 말이 실감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헤르만 헤세는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것은 바로 삶의 음악이며, 완벽한 '옴'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한국 케냐 협회 회장 허필수 저자의 고백 같은 문구가 기억에 남는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고 배워보지 못한 것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기적으로 살아본 경험은 충분했지만 그것이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선이 모두 나를 향하지 않고 밖을 향하고 있으니 말이다.'
노래하는 인문학 연구 소장은 헤세의 데미안을 통해 25세 때 평생 공부하는 학자가 되겠다는 '사명 선언서'를 만들었다고 한다.
한 사람의 작가가 책을 통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선사한다. 수많은 싱클레어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데미안이 되어 가는 과정이 헤세 이후로 계속 진행되고 있다. 내 안의 싱클레어가 데미안으로 살아가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헤세가 전하는 메시지가 이 책의 저자들의 삶을 통해 구현되어졌음을 알 것 같다. 54명의 데미안이 수많은 싱클레에에게 전해주는 이야기는 주말 시간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준 것 같다. 책으로 가는 사랑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