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버리기 기술]-마크 맨슨
책 표지처럼 글의 내용도 익살스럽다. 저자는 비틀어 보고 뒤집어 보면서 다르게 보는 연습을 통해 새롭게 보는 법을 아는 것 같다.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기도 하고, 가끔은 조금 격해져 있고 역설적인 표현을 쓰기도 하는 저자의 글은 왠지 모르게 아들의 글과 닮아 있다.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라 ‘왜 따라야 하는데요?’라는 사춘기 아이의 밑도 끝도 없는 반항적 독립심이 보인다. 저자는 독서 모임을 통해 발견된 다양한 사실들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가끔 말을 하면서 자신도 몰랐던 내용이 튀어나온다. 말을 함으로써 구체화되는 그 느낌을 잘 살린 것이다. 혼자 읽기가 아니라 여러 사람과 읽다가 보면 책이 가지고 있는 다면채적인 빛을 서로가 잘 볼 수 있도록 돕기 때문에 저자처럼 다채로운 빛을 띠는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저자의 말처럼 얼마나 멀리 가느냐가 아니라 제대로 된 이정표를 따라 가는지가 중요한 게 인생이다. 사회적 관습으로 당연히 받아들이던 것들에 대해 자꾸 물음표를 던져야 함을 넌지시 이야기해주는 책이다. 통제력, 가치관, 공동체를 삶의 세기둥이라 칭하는 저자는 다양한 사례와 책을 통해 인생 진리를 공부하는 법을 제시하는 것 같다.
아우슈비츠에 잠입한 폴란드 장교 필레츠키는 인류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홀로크스트’에 대해 경고했지만, 영국에 임시 정부를 두었던 폴란드 정부나 영국 정부는 믿지 않았었다고 한다.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고 더 큰 야심으로 악을 ‘독일인의 희망’으로 가는 수단으로 이용하던 그 시절, 필레츠키의 행동은 용기가 무엇이고 생각이 아니라 실천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독일인이 떠나고 소련군을 등에 업은 공산당이 폴란드 정치를 흔들 때조차 그는 자신만의 소신으로 걸어 가지만 망명이 아닌 사형을 받아들인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을 느끼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라는 필레치키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끊임없는 욕망은 그 자체로 중독이 된다.’ 이는 자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희망의 근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플라톤의 영향으로 감성을 최대한 자제하고 이성으로 사고하는 삶을 지향해 온 삶에 대한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감성과 이성이라는 두 명이 서로 운전대를 잡고 우리를 조종하는 의식차에 대한 비유가 독특하다. 이성을 가지고 이성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감성이 의사 결정과 행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생각뇌와 감정뇌의 협력으로 하나의 완전한 사고를 하기 위한 방법 소개도 재미가 있다. 생각뇌에게 쓰는 저자의 조언도 재미있다. 생각뇌가 감정뇌를 통제할 수는 없지만 영향을 줄 수 있다. 행동하게 하는 감정을 만드는 감정뇌에게 그 행동이 어디로 향하게 할지 제시할 수 있는 게 생각뇌이다. 이 두 뇌가 잘 지내기 위해서 모로코 양탄자 상인과 흥정하는 방식으로 일관된 가치관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소통하고 연합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한다.
이성적 판단으로 결정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우리의 자만을 일깨워 준다. 모든 행동의 기반은 감성뇌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부터 우리가 선택하는 음식까지 감성뇌가 운전대를 잡고 때론 질주를 한다. 생각뇌에게 조용히 저자는 권유한다. 감성뇌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단위로 협상을 하는 것이다. 운동 1시간이 아니라 운동화부터 신어 보자고 한다거나, 명상 1시간이 아니라 감성뇌가 부담스럽지 않게 10분 그도 아니면 5분 더 가볍게 해 주기 위해 1분부터 시작해 보자고 아이 달래듯이 최소 단위를 제안하는 것이다.
‘삶을 정말로 개선할 유일한 방법은 기분을 좋게 하는 게 아니라, 나쁜 기분에 잘 대처하는 것이다.’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지금 행복한지를 묻고 답을 얻는 과정 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70% 정도의 만족감으로 생활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큰 불행도 어느 시간이 지나면 70%의 만족감으로 향하고, 아무리 행복한 일이 생기더라고 70% 만족감의 향상성을 유지한다고 한다. 이런 특성을 이해할 때 우리가 만나는 크고 작은 행, 불행에 조금은 초연해지리라.
자신의 종교를 시작하는 방법으로, 절망한 자에게 희망을 팔고, 믿음을 선택하며 모든 비판과 외부의 질문을 무력화하라. 이때, 고통에 대한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을 선택해야 막연한 희망을 유지하기 쉽다고 한다. 바보를 위한 희생의식을 만들고 천국을 약속하고 지옥을 주어라. 이익을 위해 예언하라. 사이비 종교나 히틀러가 썼던 방식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야기한다. ‘우리는 희망을 경험함으로써 희망을 잃는다.’ 꿈을 진정으로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꿈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역설적 표현들이 읽는 도중 당혹감을 주기도 한다. 히틀러의 희망이 이루어졌다면 인류는 또 다른 악의 보편성을 받아들였을 것 같다.
‘더 큰 행복을 바라지 말고 괴로움이 줄어들기를 바라지 말고 자신의 결함을 제거하기를 바라지 마라. 이것을 희망하라. 자유와 함께 오는 괴로움을 바라라. 행복에서 오는 고통을 바라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라.’ 마치 니체의 초인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초인은 고통을 잘 견딜 뿐만 아니라 고통에 찬 운명을 자신의 고양과 강화를 위해 즐거워하며 오히려 요청한다고 한다. 초인이 되려는 열망은 모든 사람의 본능이라는 니체의 삶에 대한 일화도 독특하다. 죽을 때까지 급성 복통을 겪고 살아간 니체의 개인적 삶에 대한 상상의 글과 뉴턴의 불행했던 어릴 적 삶 그리고 우리가 간과했던 아인슈타인의 천재적이었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은 분명 다른 각도의 이야기 들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종교의 탄생을 과학이라고 저자는 칭한다. 과학은 자체적으로 진화하고 개선될 수 있는 최고의 종교라는 표현도 독특하다. 희망이 보존될 수 있는 이유가 신이 언제나 보존되기 때문이라는 연결점도 그만의 개성적 시각이다.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희망’을 인류는 너무 낙관적으로 해석해 온건 아닌지 의심스럽게 만든다. 희망이 악에 대한 해독제가 아니라 그저 또 다른 형태의 악이라면? 저자의 당돌한 질문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 역사의 3400년 동안 평화를 유지했던 시간은 8% 즉 268년 밖에 없었다고 한다. 100년 동안 서구 자본주의 사회가 저지른 잔혹 행위의 대부분이 희망이라는 이름아래 자행 되었다고 한다. 전 세계적인 경제적 자유와 부를 확대하겠다는 희망을 두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인류 역사가 이를 보여 주는 듯하다. 기대하지 말고 모든 삶과 경험을 사랑하라. 희망은 자칫 모든 것이 엉망이 되는 것을 필요로 할지 모르며, 파괴적이며 현재 상태를 거부하는 것에 의존하고 있을 수 있다고 한다. ‘희망은 우리가 자신의 일부나 세계의 일부를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희망은 우리가 반대 되는 존재가 되기를 요구한다.’ 니체의 말을 잘 인용했다. ‘우리가 희망 너머를 바라봐야 하고 가치관 너머를 봐야 한다. 희망은 궁극적으로 공허하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는 것을 보라.’ 마음이 개념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근본적으로 결함과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무조건 적으로 숭배하면 해가 된다는 저자의 주장에 나도 모르게 함몰된다.
막연한 희망 대신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바라고, 자유와 함께 오는 괴로움을 바라라고 한다. 희망 없이 행동하는 것, 더 나은 것을 바라지 않고 더 나아지면 된다.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으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상상 속의 미래를 대가로 놓고 현재의 행동을 흥정하는 것이다.’ 현대인의 희망론이 현재의 가치를 어떻게 제약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문구 같다. 저자는 ‘희망을 버릴 수 있을 때 당신은 성장한다’라고 과감하게 조언한다.
40년 동안 매일 똑같은 시간과 일을 반복한 칸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준다. 칸트는 국제 통치 기구를 구상한 사람이었고, 아인 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주었고, 동물권의 가능성을 제시한 사람이었다. 칸트의 철학들을 다시 보게 한다. 삶을 위한 단 하나의 규칙은 ‘의미를 형성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의식을 최우선시하는 원칙으로 ‘인간성 공식’을 이야기해 준다. 나와 타인을 수단으로 취급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 칸트의 인간성 공식이다. 세상을 개선할 유일한 논리적 방법은 자신을 개선하라는 칸트의 사상이 저자와 잘 어울리는 표현 같다. 매 순간 나와 타인을 목적으로 대하겠다고 결정하는 선택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은 삶을 희망하지 말고 그저 더 나은 삶이 되면 되고, 우리 자신을 발전시키기 전까지는 타인과의 관계를 발전시킬 수 없다고 한다.
‘파란 점 효과’에 대한 실험도 인상 깊다. 실험자들에게 파란 점인 것과 아닌 것에 대한 관찰을 통해 결국, 파란 점이 거의 줄어들어도 감각적으로 파란 점이 있다고 믿는 현상처럼 사회의 악이 사라진 이후에는 사소한 다른 것들로 악이라는 이름을 싸우게 되는 인간 감정의 오류도 이야기한다. 저자의 말처럼 진보 역설의 핵심이다.
잘 산다는 것은 고통을 피하는 게 아니라 올바른 이유로 고통을 받는걸 의미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존재함으로써 고통을 겪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고통을 피하기보다는 고통을 잘 겪는 법을 배우는 게 훨씬 좋다고 조언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깨지는 프레질이 아니라 받을수록 더 강해지는 인티프레질을 개발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베트남 전쟁 시 서양 강대국들은 공산국가인 북 베트만과 민주국가인 남베트남으로 나누어 전쟁을 종식시키려 했다. 남베트남에서 미국의 강한 후원을 받아 리더가 된 당시의 엘리트 응오딘지엠은 기독교를 정착시키고 자신의 독재를 고착시키기 위해 국민의 80%가 믿는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원을 파괴하고, 평화롭게 시위하는 승려들에게 폭탄과 총을 쏘는 등 권력을 손에 쥔 한 인간의 잔인성을 모두 보여 주었다. 승려 틱꽝득은 온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직접 도로에 성냥을 그어 몸을 불타게 만든다. 가부좌를 틀고 조금의 미동도 고통도 없이 자신을 태우고 있는 한 사람의 사진이 전 세계인과 베트남 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결국, 응오딘지엠과 그들 가족모두 암살되게 만든다. 인간의 몸은 이렇게 깨어지지 않는 안티프레질 기질이 있다.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아티프레질이 되거나 프레질이 된다. 우리의 삶이 하나라도 프래질 한 이유는 고통을 회피하는 선택 때문이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이 간다. 단순한 쾌락과 욕구,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어린애 같은 가치관을 택하기 때문에 프래질해지는 것이다. 명상의 핵심이 안티프래질을 연습하는 것이라 한다. 모든 잡념이나 두려움,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명상이다.
‘세상이 얼마나 부유해지든 우리 삶의 질은 인격의 질에 의해 결정되고, 인격의 질은 고통과 우리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고통을 맞이하고 그 안에서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라는 저자의 조언도 값지다. 사회가 발전될수록 기업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기 위해 가짜 자유를 제공한다. 우리는 점점 더 취약해지고 더 많은 선택지가 자유인 것처럼 느껴지는 가짜 자유로 인해 가치관의 크기와 개념적 세계가 좁아져 결국 자유를 잃게 된다고 저자는 일침을 가한다. 휴대폰이나 이메일, 인스타 그램 같은 저급한 중독 행동을 부축이고 부정적 감정 식별을 용인하고 찾아내지 못하는 나름의 속박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수십 개의 채널이 있고 수십 가지의 물건을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많아질수록 어떤 선택 사항을 받아들이든 덜 만족하게 되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행복 추구가 우리를 유치함으로 후퇴시킨다면, 가짜 자유는 유리를 그곳에 머물게 한다.’
‘삶에서 포기할 것을 선택하는 것, 그게 진짜 자유다.’ 가짜 자유는 더 많은 것을 쫓게 만들지만 진짜 자유는 더 적은 것으로 살아가게 돕는다. 가짜 자유는 우리를 쳇바퀴에 올려 두고 더 많은 에너지를 쏟게 만들고 중독성이 있고 이익이 감소하게 만들고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진짜 자유를 경험할 능력을 제한시킨다. 기쁨과 의미를 얻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더 적게 들고 우리의 의지로 욕망을 이길 수 있도록 돕는 진짜 자유를 선택해야 함을 알 것 같다. 선택 사항이 많을수록 다양성이 풍부할수록 선택하고 희생하고 집중하기 더 어려워진다는 저자의 말에 여러 생각이 교차된다. 더 많이 바라기보다는 무엇을 버릴지를 생각해야 한다. 희망을 찾지 말고, 절망을 피하려 하지 말고 뭔가를 안다는 듯이 굴지도 말며 더 나은 것을 희망하기보다는 그냥 더 나아지라고 한다. ‘다양성이라는 가짜 자유를 거부하고 헌신이라는 더 깊고 의미 있는 자유를 선택하기를 감히 희망한다.... 자유는 불편함을 요구한다.’
저자의 글은 가볍게 시작했다고 무겁게 끝나는 대화 같다. 막연한 희망으로 오늘이라는 시간을 버려서는 안 되고, 많은 것을 갖기보다는 내 삶에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가지고 갈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잘 선택해 삶의 배낭을 가볍게 해야 한다. 진정한 여행자는 배낭이 가볍다고 한다. 자신다운 삶을 위해서는 저자의 말처럼 고통을 피하기보다 성장을 위한 도구와 안티프레질한 사람으로 만드는 도구로 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함을 한 수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