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퐁스 도데 단편선]- 알퐁스 도데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생각을 읽는 것이다. 현대가 아니라 1850년대의 소시민들의 생활상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오랫동안 책 장에 꽂힌 책과의 만남은 미뤄둔 숙제를 다 한 기분을 준다.
도데의 글은 서정적이다. 풍경을 요란하게 떠들지 않지만 잔잔하게 그림의 뒷 배경을 바쳐주는 안개 꽃같은 느낌이 드는 단편들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코르니유 영감의 비밀> 편이다. 풍차로 밀을 빻았던 당시 갑자기 기계식 공장이 등장하자 더 이상 자신의 존재가치가 없어진 코르니유 영감이 빈 풍차를 돌리는 장면은 쓸쓸하다. 마을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자신들의 밀을 가지고 그의 풍차 방앗간을 다시 찾는 모습은 위안을 준다. 변화는 계속해서 진행이 되고 그 변화를 따르지 못하는 개인들은 삶의 방향을 잃을 수 있다. 코르니유 영감을 보며, 갑자기 나타난 차량공유 서비스나 식당에 나타난 서빙 로봇들도 그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는 오늘날과 닮아 있다.
고아들을 돌보는 <노부부>의 이야기는 그들의 고단한 삶을 보여준다. 작은 빵 조각도 한꺼번에 다 먹어버리는 것 또한 사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의 손자친구를 대하는 그 노부부에게서 삶에서 그리움이 진해 질 때 베어져 나오는 깊은 향기가 느껴진다. 그리움은 또 다른 사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을을 습격한 <메뚜기들>이라는 편은 슬프다기보다는 그냥 담백하게 상황을 묘사한다. 손가락 한마디 정도 크기의 메뚜기 떼가 마을을 찾아오고 사람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들을 쫓아 내지만 결국 남은 건 그들의 그림자 같은 앙상한 잔재들의 묘사는 무력감을 준다. 삶이 전투 같던 시절이 있었다. 그 전투가 끝이 나고 안락한 평화의 시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고 살아야 할까.
도데는 57세의 나이에 세상과 이별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아를라탕의 보물>이 가장 인상 깊은 소설이다. 화자 앙리 당주는 그의 애첩 마들렌 오제를 잊기 위해 파리를 떠나 한적한 시골로 간다. 그 시골에서 한때 그와 하루를 보냈던 아름다운 나이스가 그녀의 남편 샤를롱과 살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녀는 변해 버린 자신의 외모를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지만 사춘기를 겪고 있는 여동생 지아로 인해 자연스럽게 그와 마주한다. 조용하게 전개되는 듯 하지만 그 안에 잠재된 숨은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자신의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살하는 지아와 그녀와 내적 고민이 닮은 화자 앙리 당주는 자신의 고민을 극복한 듯 보인다. 한 때 앙리의 정부였던 마들렌 오제의 반 나체 사진을 보물인 듯이 자랑하는 아틀라탕 영감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내 보물 속에는 사람 구하는 풀과 사람 죽이는 풀이 있지.' 그 보물로 지아는 죽음을 화자 앙리는 살아갈 힘을 얻는 걸 보니 영감의 말이 이해가 간다. '이 아를라탕의 보물은 우리의 상상력과 닮지 않았을까? 다양한 걸로 이뤄져 있고, 밑바닥까지 탐구하기엔 너무나 위험한 상상력 말일세. 사람은 그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지.'라고 앙리 당주는 지인에게 편지로 이야기하며 단편은 끝이 난다.
도데가 이야기하고 싶은 깊은 내면 까지는 완전하게 와닿지 않는다. 이 소설에 대한 평을 읽어 보니 조금 더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아를라탕의 보물은 우리의 상상력과 닮았고, 다양한 걸로 이뤄져 있고 밑바닥까지 탐구하기엔 너무나 위험한 상상력이라고 한다. 사람은 그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고 한다. 시가 도덕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해방시키는 것이라는 평도 인상 깊다. 앙리가 지아에게 들려주는 시를 통해 도데의 시에 대한 또는 시인에 대한 평을 알 것 같다. 모든 위대한 시인은 흔들리는 별을 볼 수 있고, 눈에 빛을 가득 채우고 있어 저속한 생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앙리의 심리적 상태를 느낄 수 있었다. '침묵이란 보통 소통 아닌 것의 극한을 보여준다고 생각되는데. 정말로 침묵은 때로 <아를라탕의 보물>에서 이런 식으로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라는 논평도 기억에 남는다.
소설은 삶이고 시는 상상이다라는 말이 떠오는 단편이다. 조용하게 흘러가는 강물 아래로 수많은 생각들이 끊임없이 존재의 가치를 따지는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는 게 삶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