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없는 현실]- 요아함 바우어
온라인 속을 돌아다니는 게 어느 순간 익숙해졌다. 쇼핑을 하고, 글을 읽고, 다른 사람들이 쏟아내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즐겨 본다. 어지러운 국제 정세와 한국 정치 이야기는 꼭 알아야 할 것 같아 자꾸 손길이 간다.
비에 옷 젓듯이 이렇게 흠뻑 젓어도 되는지 가끔 의문이 든다. 인공 지능의 시대는 인간에게 새로운 미지영역과 함께 불안감도 선물한 것 같다. 신경 과학자이자 내과 및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두 손자와 그 아이들이 낳을 후손에게 바치는 글을 썼다.
불씨 만드는 방법을 알고 난 후 인류 삶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 불을 유익하게 활용하기도 했지만, 잘못 다룬 실수를 통해 인류는 사용법에 익숙해졌다. 온라인이라는 또 다른 세계는 분명 인간에게 큰 선물이다. 하지만, 그것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출 때 유용한 삶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손자와 후손에게 그 능력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쓴 것이다.
디지털 신화와 21세기의 퇴행,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디지털 중독과 현실감 상실, 새로운 종교 트랜스 휴머니즘, 인공지능 대 인간의 지능, 디지털 나르시시즘 그리고 인간성을 방어한다는 주제 아래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21세기의 퇴행 즉 새로운 중세 시대로 전락할 수 있는 디지털 신화에 대한 저자의 일침은 날카롭다. 강폭해 지는 폭력성과 마약류 소비가 늘어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정치는 현실을 감당하기 어려워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회의 방증일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사회를 예로 설명을 했지만, 사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나타나는 조짐이다.
중세는 종교를 통해 저 어딘가의 다른 곳의 삶에 대한 신비주의를 대중에게 퍼트렸다. 대중을 쉽게 선동하고, 복종하게 만드는 전략으로 오랫동안 인간 삶의 한계와 굴레를 만들었다. 현실 삶을 하찮게 보는 것에서 벗어나 더 나은 세상으로 살만한 가치를 가진 세계로 바꾸려는 힘을 모야한 한다는 의지로 계몽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계몽 이전을 퇴행이라고 하는데, 지금 인류가 자칫 퇴행 현상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디지털 기술은 서두르지 않는다. 작은 발걸음으로 현실감을 잃게 만든다. 은근하게 암시를 흘려 가며, 너무 깊은 함정을 파서 충격을 주지 않도록 유념하면서 디지털 상품으로 편리함을 즐길 수 있다고 유혹한다.’ 중세의 종교처럼 디지털 기술이 현실을 의식하거나 인지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음을 알 것 같다.
몸과 정신은 분리할 수 없는 인간의 특징이지만 온라인 속 세계에서 인간은 몸과 정신이 분리된다. 지상 위의 천국이 아니라 온라인 속 안의 천국은 마치 민중의 아편처럼 중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현실보다는 온라인 속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환상속에 정신이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몸이 살고 있는 현재를 느끼지 못하고 삶을 무심히 흘려보내고 있을 수 있다.
인류의 70%가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다. 쉽게 얻어지는 정보로 뇌는 편리함을 느껴, 어렵고 혼자 공부하고 터득하는 과정을 구식이라 여길 수 있다. 온라인 영향으로 인류는 오히려 문해맹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사회에 필요한 사람들이 부족해지는 현상이 생길 것이라고 한다. 뜨거운 불에 화상을 입기 전에 적당한 거리와 조절력이 필요한 시대 같다.
저자는 현실로 돌아가라고 조언한다. 인간과 인공지능은 비교될 상품이 될 수도 없고, 비교되어서도 안되지만, 디지털 신비주의는 인간이 인공 지능보다 못하다는 것을 믿게 만든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몸이 없다. 인간의 몸은 두뇌와 현실 세계가 맞물리는 접점이 되고, 몸을 통해 현실과 교류하면서 두뇌가 발달된다. 그래서 인간을 두뇌로만 봐서는 안된다. 인간은 말과 몸짓으로 전달되는 감정과 상대방의 움짐임을 통해 공명하는 존재다. 온라인 속에서는 공명 되지 않는다. 인간은 오래 지속된 관계 안에서 나눈 공명이 내재화되어 자아가 완성이 된다.
생후 24개월 까지 ‘이마엽’이 발달되면서 자아의 핵심이 자리 잡는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어른으로부터 관심을 받는다는 것을 알 때 자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관계가 현실을 만든다는 논리다. 아이는 실제 곁을 지켜주는 어른, 동년배가 필요하다. 아날로그 현실에서 사랑을 주고받는 일이 디지털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 것 같다.
저자는 현재를 상실의 시대라고 부른다. 양 떼를 지키는 목동이 돌연 늑대로 변해 자기 배를 채우는 행동을 하기 쉬운 시대라는 것이다. 피해자가 겪는 아픔을 헤아리기보다는 가해자의 편에 서서 잇속이나 챙기려는 ‘범인과의 동조’ 현상을 보이는 스톡홀름 증후군이 나타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을 폄하하고, 이태원 압사 사건의 희생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며, 비상계엄으로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전직 대통령을 옹호하는 스톡홀름 증후군 환자들을 보며, 저자가 경고하는 메시지가 중요함을 알 것 같다.
놀이 일상이 서서히 변하고 있다. 부모의 관심이 필요한 아이들이 가까이 있는 어른에게 무시당하는 경험을 하루에도 여러 차례 겪는다는 말도 공감이 간다. 아이도 엄마도 서로 휴대폰을 들고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어 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함께 있는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보는 상대를 통해 모멸감을 느끼는 퍼빙 Pubbing(폰 phone + 스너빙 snubbing-누군가를 타박하거나 냉대)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디지털 세상이 인간의 머리 쓰는 능력을 빼앗아 조작하기 쉬운 닭의 무리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이로 인해 현재 사회의 분열이 일어나고, 대화가 어려워져 인간의 중요한 특성인 결속력을 통한 회복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 극우들의 억지스럽고 폭력스러운 태도를 보면서, 저자가 우려하는 일들이 온라인 매체를 통해 인간이 닭의 무리로 변해 버릴 수 있다는 말도 공감한다.
소셜 미어를 사용하는 아동과 청소년에게는 더 막강한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 우려한다. 지나친 온라인 사용은 현재에 충실한 정신력과 맑은 두뇌로 아날로그 현실을 지켜낼 정신력을 흐려버린다는 것이다. 비판적 안목은 사라지고, 스마트폰에 의지해 행동을 결정하고, 괴로운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늙어 가지만, 정신 만은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새로운 종교 트랜스 휴머니즘은 디지털 신비주의를 퍼트리고 있는 건 아닌 의심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현실이 확실하다고 믿어야만 정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현실의 확실성과 정신 건강의 상호 작용이 디지털 시스템이 인간의 도구로 자리잡도록 도울 것이다. 우리가 디지털 시스템에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수동적으로 소비를 하는 최면 상태에서 깨어나야 함을 저자는 조언한다.
인공지능으로 인간은 자칫 편협함의 우물 안에 갇힐 수 있음을 알 것 같다. 경솔하게 다루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산인 현실을 느껴야 한다. 온라인 속에 정신을 쏟아두느라 시간을 잃어버리고, 자연을 상실하지 않도록 경계해야겠다. 도구를 사용하는 사용자로서 불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균형을 맞추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