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

음식과 지식의 공통점

by 레미

내가 일하는 곳의 상사 중, 자신의 다독(多讀)에 굉장히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 1년에 200~300권 이상의 책을 읽는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그 독서를 토대로 나름 글도 꽤 많이 썼다고 한다. 주변 사람이나 부하 직원들에게도 책을 많이 읽고 자기계발에 힘쓸 것을 권유하며 다닌다. 그러나 그런 그를 볼 때마다 내가 드는 마음은 존경심이 아니라 참 어리석다는 마음이 든다.

불과 어제 일이다. 직속 후배가 회사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다녀왔다. 참가자가 아닌,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다 챙겨야 하는 스텝이었고, 주말을 끼고 주중까지 이어지는 행사였기에 그 후배는 출근일은 물론이고 출근하지 않는 날까지 모두 사용하여야만 했다. 녹초가 되어 오후에 돌아온 후배에게 여기 업무는 내가 해도 되니 어서 집에 가서 쉬라고 보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상식이었는데 상사는 아니었나 보다. 나중에 나한테 따로 와서 그 후배를 왜 보냈냐고, 행사에서 돌아왔다 해도 엄연히 출근일인데 시간 다 채우고 자기 자리는 지키고 자기 일까지 다 하고 가야지 않냐고 더할 나위 없이 근엄하게 훈계조로 얘기하는 그 꼴이 참..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출근일도 아닌 날까지 포함시켜 3박4일을 일을 시켜놓았으면 오후에 복귀했을 때, 집에 가서 쉬라고 하는 게 그렇게 잘못인가? 참고로 초과 근무하는 시간만큼 꼬박꼬박 수당을 따로 챙겨주는 것도 아니다. 업무는 내가 대신 해놓았고 실제로 별 문제없었다. 그냥 자기보다 먼저 퇴근한게 아니꼬웠나 보다.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다고 하는 사람이 인간의 기본적인 소양은 갖추지 못한 모습. 자기계발에 인격은 제외인 것 같아 안타깝다. 차라리 어디 가서 책 읽었단 얘기를 안하고 다녔음 좋겠다.

지식은 열심히 머릿속에 쑤셔박는다. 그런데 그 지식대로 살지는 않고 그냥 바로 다음 지식을 구매하여 다시 머릿속에 계속 추가한다. 마치 물건을 구매하여 한번 확인하고 창고에 넣은 뒤 다시 새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 같다.

음식은 먹은 다음에 끝이 아니라, 몸 속에서 소화하여 자기 몸에 영양분을 흡수를 시켜야만 비로소 음식을 먹었다고 할 수 있다. 먹자마자 격렬한 복통으로 인한 설사, 아니면 구토 등으로 다 그냥 배출되어 버렸다면 그 음식은 먹었다고 할 수 없다. 지식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어 새 지식을 얻었으면 그 지식을 내 삶에 맞게 적용하여 체득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그 지식은 내 것이다. 읽고 휙 던지고 다음 책을 읽는 것은 시간낭비다.

독서를 하며 그 작가의 글의 의도를 자기의 가치관으로 해석해보고, 자기 삶에 적용해보는 시간은 비로소 그 독서의 시간을 가치있게 만들어준다. 이는 뼈다귀를 핧고 물고 맛보면서 온전히 그 시간을 만끽하는 개에 비유할 수 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읽고, 말하고자 하는 의도에 대한 해석, 나의 삶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적용까지 연구하는 시간, 그런 것이 있어야 비로소 그 책을 '읽었다'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지식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진짜 '내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지식이 더 필요하다.

그렇다고 많은 지식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를 얻고 그에 따라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지식까지도 모두 습득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살기 참 편리하지만, 살기 참 피곤한 시대다. 그런 점에서 많은 지식은 현 시대에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큰 이로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하고 알고 있는 것과 내 것은 엄연히 틀리다. 1년에 300권이 아닌, 3000권을 읽어도 변화가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많은 책을 읽는 다독(多讀), 빨리 책을 읽는 속독(速讀)보다 글자와 낱말의 뜻을 하나하나 알아가며 자세히 읽는 정독(精讀)이 더 중요하다는 어떤 학자의 말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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