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이 지켜낸 미술품
반고흐 미술관과 유럽의 3대 오케스트라인 Concertgebouw (콘체르트헤바우)가 상주하는 음악당 사이에 위치한 Stedelijk Museum Amsterdam 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은 현대식 건물로 겉모습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지만 내실이 꽉꽉 찬 현대미술의 보물창고이다. 시립미술관은 1874년에 설립되었고 1895년부터 지금의 자리를 지켜왔다. 처음에 지어진 역사적인 건물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2012년 모던하게 건물을 증축하였다. 혹평을 받았다는 ‘욕조’ 스타일 캐노피가 어색하긴 하다.
이 미술관은 일반적인 유럽의 미술관처럼 귀족이나 왕족의 유산으로 설립된 곳이 아니고 시민들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처음 수십 년간은 개인들에게 기증받은 수집품들로 박물관을 채우다 보니 만물상을 방불케 했다. 가구와 의상부터 동전까지, 심지어는 시민 민병대의 깃발까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다 보니 정리가 될 수 없었을 거다. 결국 1920년경부터는 현대미술에 초점을 맞추고 회화, 디자인, 사진, 조각들로 컬렉션을 한정하고 엄격하게 선별하며 확장해 나갔다. 현대 미술품을 10만 점 이상 보유하고 있고, 연대별로 전시가 잘 되어 있어서 현대 미술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시립 미술관은 1936년 Willem Sandberg가 부임한 이후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꾸준히 전시를 개최하며 예술가들의 저항심을 보여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암스테르담 인근의 모래언덕 벙커로 박물관의 주요 소장품들을 옮겼고, 박물관 직원들이 교대로 감시하며 미술품을 지켜냈다. 종전 후에는 Sandberg 관장의 야심 찬 기획과 선견지명으로 컬렉션은 풍성해져 갔고, 반 고흐 컬렉션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반 고흐 컬렉션은 반고흐 미술관이 생기면서 분리 이동되었고, 그 빈자리는 또 다른 현대 작품들로 채워졌다.
1층의 첫 번째 방을 들어서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1880년 즈음에 그려진 걸작들로 전시실 벽마다 작품이 꽉 차게 걸려 있었다. Oskar Kokoschka, Georges Braque, James Ensor, Marc Chacall, Vincent Van Gogh, Jan Toorop, Paul Cézanne 등 이름만 들어도 너무 행복하지 않은가.
<Until 1950년 컬렉션>에서는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선구자인 Kazimir Malevich (1879년-1935년)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말레비치는 러시아 제국과 폴란드, 우크라이나의 관계가 복잡했던 시대에 지금의 우크라이나 수도인 Kiev에서 출생하고 활동했다. 폴란드계 가정에서 태어난 말레비치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자신을 폴란드인이라고도 했고 우크라이나인 이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러시아 작가라고 구분되어 왔다. 대부분의 학술 문헌과 박물관에서는 그가 러시아에서 활동하며 명성을 얻었다고 러시아 출신이라고 구별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우크라이나 사람이다. 최근 들어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서는 말레비치를 우크라이나 출신이라고 공식적으로 정정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말레비치의 국적을 명확히 하자는 움직임이 있는데, 점차 그의 정체성을 재고하는 분위기이다.
그는 25세인 1904년에 모스크바로 이주하고 그곳에서 회화, 건축, 조각등을 공부했다. 그는 프랑스의 인상파와 야수파 작품들을 접하며 빠르게 동화되어 갔다. 1912년 파리 여행을 다녀온 말레비치는 자신의 스타일을 점차 단순화시키고 순수한 기하학적 형태를 사용하며 탐구하였다. 그의 작품은 추상화로 빠르게 바뀌어갔는데, 이 새로운 장르가 러시아 아방가르드이다. 이는 소련이 탄생한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소련에서 일어난 예술 현상이다. 인상주의, 야수파, 입체주의와 같이 서유럽에서 들어온 여러 미술 사조와 러시아 고유의 민속 예술이 섞여서 그들만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절대주의 등이 만들어졌는데, Wassily Kandinsky (1866-1944)와 말레비치가 그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03년 레닌이 이끈 볼셰비키는 추상 미술을 지지했지만, 1920년부터 러시아 예술가들의 자유는 점점 위축되어 갔다. 1924년 레닌의 뒤를 이은 스탈린은 또 다른 예술 이념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국가정책으로 지정했는데, 말레비치는 이 스타일을 끝까지 거부했다. 결국 그는 모스크바 미술학교의 교수직도 잃게 되었고, 연구물은 압수당하고 추상작품 활동도 금지당한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을 못 견딘 칸딘스키는 독일의 바우하우스로 돌아갔고, 말레비치는 레닌그라드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건너가서 직물이나 벽지와 같은 실용미술 작업을 하다가 1935년 5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생은 짧기도 했지만, 그 짧은 시간마저도 온전히 창작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깝다.
폐쇄적인 러시아에서만 활동했던 말레비치의 작품이 어떻게 암스테르담까지 이동되었고, 이곳에 많이 소장되어 있는 걸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는 러시아 보다 많은 24점이나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들이 서유럽으로 오기까지는 수집가들의 공이 컸다.
우크라이나 작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Nikolai Khardzhiev (1903-1996)와 그리스계 러시아인 Georges Costakis (1913-1990)가 수집한 러시아 아방가르드 컬렉션은 그들이 서유럽으로 이주하면서 반출해 나왔다. 이들은 소련이 추상 미술을 금지했던 시기에 상당한 양의 러시아 작품을 수집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에 동조하는 것은 반혁명 행위에 해당하는 범죄임에도,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수집했다.
카르지예프는 말레비치가 예술 활동을 금지당한 1930년경에 말레비치 작품을 포함한 여러 작가의 미술작품과 문학작품, 그리고 다양한 문서들까지 엄청나게 많은 양의 기록들을 수집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에 러시아에서 안전함을 느낄 수 없었던 그는 컬렉션을 가지고 서유럽으로 도피하게 된다. 카르지예프는 암스테르담 대학 연구소의 도움으로 미리 재단을 설립해 두고, 1993년 90세의 나이에 부인과 함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며 컬렉션을 반출하고 대학교 재단에 맡기게 된다. 그가 사망한 후 1997년부터는 시립미술관에서 그의 컬렉션을 관리하고 있다. 이 작품들이 서유럽으로 나온 것이 불과 얼마 안 된 셈이고, 이 과정은 쉽지 않았다. 소련과의 끊임없는 협상을 통해 결국 암스테르담에 안착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수집가, 조지 코스타키스는 세계에서 가장 큰 러시아 아방가르드 컬렉션을 수집하였다. 코스타키스의 경우에는 1977년 소련을 떠나 그리스로 이주하면서 소련과 합의를 본다. 그 결과 컬렉션의 50퍼센트는 모스크바의 미술관에 남겨 두기로 하고, 나머지 컬렉션만 그리스로 반출해 나올 수 있었다. 그리스는 국가 차원에서 1,275점을 코스타키스에게 구입하고 Thessaloniki에 있는 MOMus–Museum of Modern Art에서 전시하고 있다. 이 수집가들에게 컬렉션의 의미는 국경을 넘어서라도 데리고 나와 자유를 주고 싶던 자식 같은 존재였을 거다.
미술관에서 수많은 작품들을 접할 때면 별생각 없이 쓱 지나가면서 보는 경우가 태반인데, 이 분들이 목숨 걸고 수집하고 반출해 낸 작품들이라니 그냥 단순하게 그림만 감상할 게 아니었다. 많은 분들의 수고와 열정이 대단하고 감사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미술관이란 곳은 그림을 보여주는 목적 이외에,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예술가와 후원가 그리고 수집가의 혼이 담겨 있기에 매력적인 곳이다. 이곳은 진정 시민들의 사랑으로 설립되고 수집되고 관리되는 곳,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미술관인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