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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프 Apr 06. 2022

집으로 가는 길


보름의 정기휴가를 정신없이 보내고 무사히 복귀 신고를 마쳤다. 예비대에서 받았던 유격훈련을 비롯한 각종 힘들었던 훈련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휴가가 끝났다는 것은 조만간 해안 경계병으로 경계임무에 투입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임무교대를 위한 중대 간 인수인계 절차가 원활하게 진행되어 가는 중에도 머릿속에는 온통 아버지의 힘들어하는 모습이 자꾸 떠올라 신경 쓰였다. 평소에 허리병과 좌골신경통으로 불편해하신 아버지는 그저 “늙어가며 감내해야 할 업보다” 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해왔었다. 그러나 이번 휴가 때 본 아버지 모습은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오십 대라고 하기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몸이 쇠약해진 것 같았다. 병원을 전전하고 용하다는 한의원을 다녀봐도 별반 증상이 호전되지 않자 요양 차 시골로 들어가셨고, 휴가 대부분의 시간을 아버지와 함께 보내다 왔다. 복귀하는 날, “내 걱정하지 말고, 다치지 않도록 니 몸이나 잘 간수해라!” 힘겨운 목소리로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셨다.

어수선했던 소초(小哨) 막사도 잘 정리되었고 야간 경계 및 순찰 임무로 주야간이 바뀐 생활에 익숙해질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그날도 밤을 꼬박 새우는 경계임무를 끝내고 동이 틀 때쯤 철수하여 장비 정비를 하고 침상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오전을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나 보니 집에서 편지 한 통이 와 있었다. 어머니가 보낸 편지였다. 한 장의 그리 길지 않은 글을 읽어 내려가다가, 갑자기 머릿속 모든 것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듯 멍하니 시선을 고정시켰다. 초점을 잃어 글씨가 뿌옇게 변한 채로…

 “니 아버지 시한부 선고받았다. 얼마 남지 않았다…”


한동안은 믿기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그게 어떤 일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하루 시간을 더해가면서 걱정과 불안함은 커져만 갔다. 청원휴가를 신청했지만 절차와 여러 가지 사유에 의해 쉽게 받아 들어지지 않았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겨울바다의 차갑고 시린 해풍 그리고 정신력만으로 통제하기 힘든 졸음을 밤새 맞닥뜨려 견디어 내고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친 몸을 누였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누군가 몸을 흔들어 깨웠다. 베개가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서럽게 울었던 모양이었다. 아버지와 헤어지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중대장의 호출이 있었다. 휴가 준비를 하여 급히 중대본부로 올라오라는 것이다. 이제야 청원휴가가 받아졌구나 생각하고 서둘러 본부로 올라갔다. 중대장은 신고도 받지 않고 휴가증을 손에 쥐어 주고는 어깨를 토닥거리며 별다른 말은 없이 잘 갔다 오라는 말만 하였다. 부대를 나오면서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져서 휴가증을 보니 휴가기간이 지나치게 길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집에서 관보를 보내 부고 사실을 부대에 알린 모양이었다.

서너 번의 시내버스와 시외버스를 갈아타는 번거로움을 겪은 후 집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부대에서 출발할 때부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차창을 멍하니 바라보며 현실이 아니길, 부디 꿈을 꾸고 있는 것이길 간절히 기원해 보기도 했다. 집으로 향하는 짧은 시간 동안 아버지와 함께한 수많은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따라 야속하게도 고속버스는 너무나 빨리 달린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가슴을 옥죄어 왔다. “이게 진짜 현실이면 어쩌지?” 그렇게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이는 혼란함 속에서 마침내 집 근처까지 왔다. 이제, 골목길 모퉁이만 돌아서기만 하면 집이 보일 거다. 차마 모퉁이를 돌아설 수 없었다. 담벼락에 기대어 줄 담배를 몇 대 연거푸 피우고 난 뒤에 마음을 다잡고 모퉁이를 천천히 돌아 나갔다. 


집 입구에 근조 등(謹弔燈)이 덩그러니 걸려있었다…


22살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길에 겪어내야만 했던 가슴 아픈 기억을 겹겹이 쟁여 두었다가, 한동안 아버지가 보고 싶어 질 때마다 하나씩 끄집어내어 추억으로 되새기고 그리운 마음을 이렇게 남겼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도 그 목소리가 듣고 싶겠네


사흘은 

얼룩진 내 베개의 눈물자국으로

소금기 배여

혀가 아리었었고

나머지 날들은

낡은 앨범 속에 빛바랜 사진으로

그리움을 달래지만

옥동에 아버지를 묻었고 

동대산에 할머니를 묻었는데…


아! 

돌아누워도

밤은 그리움으로 언제나 꿈결 같고

촛불을 켜면

죽은 이는 소리 없이 다가와

귀에 익은 숨결로서

토닥

토닥

창가에 긴 사연만 남기네...

86’


그러나 이제 세월이 너무나 많이 흘러버렸다. 꿈조차 꾸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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