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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프 Jan 11. 2022

산을 오르며

설악산 등반 후기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산을 찾는다. 지척에 영남 알프스가 자리하고, 집 뒤에 문수산이 있어 별 준비 없이 가볍게 산을 오를 수 있다. 근래에는 몹쓸 전염병 탓인지 산을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오늘도 동이 채 트기도 전에 주섬주섬 준비하고는 집을 나섰다. 등산로 초입에서 자주 보게 되는 사람들, 그들 중엔 유독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지팡이를 짚으며 끌듯이 옮기는 발걸음이 무척 힘들어 보이는 이, 그는 작년 이맘때만 해도 반신이 불편해 아내인 듯한 여자의 부축을 받으며 언덕을 힘겹게 올랐었다. 그런데, 볼 때마다 그의 상태는 호전되어 가고 있었다. 그의 곁을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내게까지 삶에 대한 의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렇게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산을 오르다 보니, 몇 해 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직장 후배 해준이 생각났다. 떠나기 몇 달 전 통근버스에서 만났을 때 안쓰럽게 바라보는 나에게 헛헛하게 웃으며 “산다는 게 다 그런 것 아닙니까!” “설악산 등반 갔을 때 폭설이 와서 고생한 일 생각나죠?” 그의 눈빛은 이미 마음의 정리를 한 듯 오히려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눈앞에 닥친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이 어떠했는지 세세히는 알 길이 없고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했기에, 이제 나이가 점점 들어 감에 살아왔던 날들을 교훈 삼아 앞으로 살아갈 날들은 후회하지 않는 삶이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 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리고, 2006년 12월 설악산 등반 후 적었던 후기 글을 꺼내 읽어보며 해준과의 추억을 되새기고 그의 명복을 빌어 본다. 


미명의 새벽 십이선녀탕 들 머리는 암흑에 둘러싸여 있다.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질 즈음 설악의 한쪽 끝자락은 장좌불와(長坐不臥) 중인 수도승처럼 어렴풋이 그 장엄한 윤곽을 드러낸다.

이제, 스스로를 격려하며 설악의 품에 안길 시간이다.

가슴 한 구석에 생채기를 내며 고통스러워했던 기억들, 시름에 겨운 끈질긴 인연의 끈, 이제 그리운 어머니의 품속 같은 자비로운 설악의 품속에 다 내려놓고 싶다.

-산행- 

희미한 랜턴 불빛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발걸음을 옮긴다.

시리도록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든다. 몇 번의 기침, -그것으로 세상의 찌든 때를 다 씻어낼 수는 없지만 애써 내뱉는 기침, 신선한 공기가 몸속으로 스며드는 느낌만으로도 맞볼 수 있는 카타르시스-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산길을 오르면 등산화 바닥에 닿는 낯선 돌부리의 감촉은 첫사랑의

미소처럼 가슴 설레게 발 뒤꿈치를 타고 오른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즈음 여명이 밝아온다. 답답하던 장막이 걷히듯 서서히 어둠을 비껴 설악은 신비로운 자태를 하나 둘 드러내기 시작한다.

얼음나라 계곡, 신비로운 선녀들의 채취를 얼음 속 깊이 품은 고요함, 간간히 골짜기를 스쳐 지나가는 시린 바람,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들리는 설악의 음성에 나는 등산로 가득 쌓인 가을의 잔해들을 밟아 사각거리며 대답한다.

어디쯤일까?...

배낭의 무게가 삶의 무게처럼 느껴지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응달의 채 녹지 않은 습설(濕雪)이 등산화를 적신다. 

한걸음, 한걸음 지친 발걸음을 내딛다 보니 청명한 하늘을 이고 능선 자락이 눈썹 밑으로 쓱~ 다가온다.

대승령이 손에 잡힐듯하다. 세찬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능선을 따라 걷다가 무심히 고개를 돌리니 설악의 능선 자락이 용의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대승령…

능선 아래 한계령 길이 발에 밟힐 듯하더니, 장수대를 허리춤에 감추고 수많은 산(山) 사람의 발길을 허락한 대승령이 촌부처럼 수더분한 모습으로 산(山) 사람들을 반긴다. 

-야영-

대승령 서쪽하늘이 수줍은 각시의 볼처럼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능선을 조금 비켜간 옴팍한 곳에 서둘러 준비한 -산 사내들의 첫날밤을 시샘하는 북풍도 비껴가는- 포근한 저택 두 동, 어둠이 설악을 앗아 가고서야 산 사람들만의 만찬을 즐긴다. 

포만감을 느끼니 피로가 몰려온다.

능선 머리에서부터 허리 통증을 호소하던 홍식이 좁은 텐트 안에서 노숙자처럼 초췌한 모양새로 끙끙거린다. 안쓰러운 마음에 구급 잡낭에서 맨소래담과 찜질 파스를 꺼내 허리 마사지를 해 주었다. 저런 몸으로 대청봉까지 갈 수 있을까? 걱정스럽다. 

텐트 안에서 내의를 입기 위해 파일을 벗으니 한기가 뼛속 깊숙이 파고든다. 온몸을 덜덜 떨며 서둘러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움츠린 어깻죽지 사이로 서서히 온기가 감돌기 시작한다.

텐트가 비좁아서 어깨가 부대낀다. 소음에 익숙해진 청력이 죽음 같은 고요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귓불에 스르르 공명을 일으킨다. 몸을 서너 번 뒤척일 즈음 벌써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코 고는 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기적소리처럼 희미해져 간다.

꿈일까? 사박거리는 소리가 귓불을 간지럽힌다. 무슨 소리일까? 꿈결처럼 그 소리의 진원을 생각하다 갑자기 숨이 막혀오는 듯한 압박감에 정신을 추스른다

침낭 한쪽면이 온통 습기로 가득 젖어 있고, 텐트가 무너질 듯 찌그러져 있다.

밤새 지친 산 사내들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 눈이 도둑괭이처럼 살그머니 내린 모양이다. 

정적을 깨는 작은 소란에 모두 잠을 깼다. 

내심 기대했던 눈이 내리고, 온통 눈에 덮인 설악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리라는 환상은 부스럭거리며 텐트 입구를 여는 순간 산산이 깨어졌다.

폭설이다. 몇 시간 동안 내린 눈이 텐트를 반쯤 삼켜 버렸다.

-하산-

동이 틀려면 아직 한참은 더 있어야 될 것 같은데… 서둘러 짐을 챙기고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지만 도무지 그칠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보니 헤드랜턴 불빛을 따라 마치 가스가 낀 듯 하늘에 온통 뽀얗게 함박 눈꽃을 흩뿌리고 있다. 이대로 눈이 그치지 않는다면 대청봉 정상을 오른다는 것은 무리일 듯싶다.

시간이 얼마나 흘렸을까? 랜턴에 의지하지 않고도 헐벗은 나뭇가지에 소담스럽게 핀 눈꽃이 보일만큼 점차 날이 밝아왔다. 눈밭 위에 서 있는 산꾼들의 모습이 마치 하얀 크림으로 덮인 케이크 위에 잘 장식된 장식물처럼 조화로워 보인다. 문득 눈에 덮인 용아장성의 신비로운 모습이 궁금해졌다. 눈 밭을 헤치고 얼마간 올라가 능선 머리가 보이는 듯하자, 장수의 칼날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눈보라가 온몸을 휘돌아 감았다.

 설악은 그 신비로운 자태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 듯싶다. 몇 번이나 더 올라야 파란 하늘 아래의 하얀 눈 세상을 볼 수 있을까?

하산을 위해 등산화에 아이젠을 단단히 조이고 스패츠 매무새를 고친다. 

혹시, 조난이나 당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지만 노련한 산꾼들은 허허롭게 하산 준비를 한다.

이미 등산로는 눈 속에 묻히고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구분할 수 조차 없다.  

대승령 이정표를 찾기까지도 한참의 시간을 소모한 듯싶다.

대승령을 뒤로한 채 장수대로 하산을 시작했다. 발이 눈밭에 허리춤까지 푹푹 빠진다.

허리춤까지 빠지는 처녀설을 헤치며 러셀, 러셀, 러셀…

노련한 산 꾼의 동물적인 감각과 간간이 눈에 띄는 리본에 의지하며 러셀…

눈 속에 묻혀 도무지 알 수 없는 지형지물을 조심스럽게 탐색하며 사력을 다해 눈밭을 헤치다 보니,

어느새, 얼음으로 뒤덮인 대승폭포가 그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고 철 계단 밑으로 장수대 대피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에필로그-

지난겨울, 생애 두 번 다시 경험해 볼 수 없는 설악의 폭설을 온몸으로 느낀 산 친구, 광억, 도영, 홍식, 태수, 해준. 모두 건강하게 지내고 있겠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삼겹살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설악 무용담을 밤새 나누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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