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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프 Nov 30. 2022

감천동 골목


연탄을 난방 연료로 쓰던 시절, 검게 눌은 아랫목 장판 위에 겨우내 묵혀지던 빨간 꽃무늬 그려진 두툼한 밍크담요가 햇빛 좋은 어느 날 오후, 골목길 낮은 담장 위에 걸쳐 널려 있을 때 그 뽀송뽀송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너무 좋아서 손과 얼굴을 쓱 비비며 지나가곤 했었다. 

그런 감각의 잔재가 남아서 인가? 지금도 가끔씩, 아주 가끔씩 연탄과 함께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는 밍크담요, 그 옛날 밍크담요라 불리던 폴리에스터 담요에서 풍기던 그 묵은 냄새와 특유의 촉감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많은 것이 사라지고 사라진 것만큼 또 새로운 것이 생겨나며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었던 꼬불꼬불한 산동네 골목길도 재개발로 인해 하나씩 사라져 가고 미로 같이 좁은 골목길은 이제 애써 발 품을 팔아야 만 겨우 볼 수 있게 되었다. 


한편으로 골목이 사라졌다는 것은 우리네 삶의 형편이 나아졌다는 방증으로 환영할 만 하나 가끔씩 해묵은 밍크담요 냄새가 그리워질 때 찾아볼 수 있는 곳이 사라져 간다는 것이 한 가닥 아쉬움으로 남는다.





감천문화마을

아주 오래전 아미동 고갯길을 힘들게 오르내리던 사람들, 어렵게 살아가던 사람들의 시름과 노고를 한편에 소복이 쌓아 두고, 그렇게 쌓인 수많은 사연들로 지은 집들이 산등성이 한 면을 빼곡히 채워 차곡차곡 자리 잡고서 감천항을 아득히 내려다보고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한국의 ‘마추픽추’ 혹은 ‘산토리니’라고 말한다.  잠시 짬을 내어 작은 옥상 카페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잔을 들고 감천항을 지긋이 내려다보면 차분하게 가라앉는 마음과 고즈넉한 저녁 풍경이 그림과 같아 무엇인가에 홀리듯 깊은 감성의 늪으로 스르르 빠져들고 만다.  


아름답다.
소박하게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에 함부로 가치를 매길 수 없고, '마추픽추'든 '산토리니'든 어쩌면 그곳들은 전부, 거대한 세력에 밀려 힘없는 자들의 수고로움으로 만들어진 곳이기에 어느 곳이 더 아름답다 가늠할 수 없지만 감천동 언덕배기는 조금이나마 정서를 공유할 수 있기에 그곳들 보다는 좀 더 편안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골목길,

미로 같이 좁은 골목이 주는 고립감.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다녀야 했던 사람들은 장롱 하나 새로 들일 수 없는 삶의 팍팍함에도 스쳐 지나가며 느꼈던 서로의 체취와 누구에게나 평등한 36.5도의 온기를 나누며 무거운 삶의 무게를 감당해 냈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리고 공평한 햇빛조차 쉬이 누릴 수 없고 숨통이 조여들 것 같은 비좁은 골목 안에는 고립감을 이겨내지 못해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부산역으로 달려 나갔던 어린 청춘들의 서글픈 사연 하나쯤은 품고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햇빛이 들지 않는다고 해서 암울하기만 했을까? 그곳에도 사람 사는 곳이기에 좁다는 핑계로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가슴 설레는 러브스토리도 있었을 것이고 힘들게 벌어 자식농사 잘 지었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있었을 것이다.

부대끼며 살았던 온갖 삶의 풍경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골목길은 “옛날엔 그랬었지…” 하며 여전히 골목을 서성이는 팔순 노인의 느린 걸음걸이만큼이나 더디게 변해 가고, 그때 가방을 싸서 홀연히 떠났던 청춘을 대신해 이제는 푸른 눈의 외국인들과 낯선 청춘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골목을 북적거리며 남긴 낯선 채취들이 화사하게 치장한 골목 안 깊숙이 퍼져 나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안타깝게 여전히 골목 안은 햇빛이 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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