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일말의 타협과 오류도 없이 완벽하게 하루를 채우며 흘렀다. 그 누구의 힘으로도 막을 수, 비켜 지나갈 수도 없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마치 종착역을 향해 거침없이 내달리는 고속열차와 같이 느껴진다.
내게 주어진 삶이라는 긴 여정의 시간이 얼마나 주어졌는지 알 길이 없고 앞날을 꿰뚫어 볼 혜안조차 없으니 앞으로 어떠한 상황을 맞닥뜨리며 살아가야 할지 한 치 앞을 예측하기도 힘들지만 이러한 나도 분명하게 알고 있는 나의 미래가 하나 있다. 내가 유일하게 인지하고 있는 나의 미래, 그것은 ‘죽음’이라는 운명적 서사(敍事)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인생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상한 것 같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깊은 고뇌 속에서 내린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정의는 나의 공허한 마음에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고, 사람들이 왜 그토록 자신들의 신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지 만이 더욱더 공감될 뿐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자신을 스스로 진(秦) 나라 최초의 황제라 칭하며 불로장생을 위해 사력을 다했던 시황제가 왜 영생이 아닌 불로장생을 꿈꾸었을까? 불현듯 들었던 의문이었지만, 늙고 병들어 누추한 삶을 영원히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고통스럽고 끔찍한 형벌이 아닐까?
어찌 보면 소멸한다는 것이 오히려 신이 내린 커다란 선물이라는 생각마저도 든다. 시황제가 왜 그렇게 늙지 않고 오래 살기 위해 헛된 욕망의 화신이 되었는지도 일면으로 수긍을 하게 되며, 남은 여정만이라도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절박감과 마음이 여려질 때면 간간이 밀려드는 공허함에, 굳세게 맞서는 두 개의 시선으로 나의 삶을 다독여 본다.
황혼에 물들어 황금빛 꽃을 피우다.
하루라는 시간 중에 가장 아름다운 때가 언제인가? 묻는 다면 나는 서슴없이 황혼에 물들어 황금빛 꽃을 피우는 해 질 녘이라고 말하겠다.
비록 ‘황혼에 물들어 간다’라는 말이 절정기를 지나 쇠퇴하여 종말에 이르러 간다는 비유적인 뜻으로 일반화되긴 하였지만 어쩌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화려한 절정기라고 생각했던 때는 온갖 종류의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을 돌이켜 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와 같은 삶을 살았기에 그 절정기라는 것이 과연 황금빛 꽃을 피울 만큼 아름다웠는지 에는 왠지 회의감이 든다.
그렇다.
인생에 있어서 황금기는 어느 정도 욕망에서 자유롭고 자신을 돌이켜 볼 여유가 있는 황혼 무렵인 지금 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위축된 나의 영혼에 작은 위로의 마음을 전하면서 황혼 무렵이라는 것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공허한 감정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단호히 맞서서 황혼에 물들어 황금빛 꽃을 피워야겠다.
외로움의 경계에 서다.
바라보는 곳이 원대할수록 밀어닥치는 시련과 저항도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다. 세상사 모든 일들이 순리대로만 이루어지지 않기에 쉽게 좌절하고 때로는 정의롭지 못한 일에도 자기 합리화라는 편리하고 작위적인 수단을 이용해 양심에 거리낌을 줄여가며 적당히 타협도 한다.
그러한 일들이 삶을 위한 치열한 방편이었고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하더라도 어느 순간, 뒤 돌아보면 그 모든 것이 덧없음을 알아차리게 되고 깊은 상념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겪어내다 보면 다음과 같은 궁금증이 생길 것 같다
삶이라는 것은 고비고비마다 맞서서 넘어야 하는 경계점이 있는데 지금 이 순간 나의 삶에 맞선 경계는 어떠한 것일까?
그렇게 굳은 의지와 장엄한 결의를 가지고 맞서기엔 다소 부끄러운 공허함에도 미치지 못하는 외로움의 경계에 서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