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려나 보다

by 돌무리

죽으려나 보다.


마누라가 언젠가 느닷없이

"여보 당신은 92살까지 산답니다".

무언가 엄청난 비밀이라도 발견한 듯 진지한 표정으로 털어놓았다.

"그래? 누가 그래?"

"사주팔자가 그래요"

"치~그놈의 사주팔자를 어케믿어?

나는 120까지는 살 건데..

그럼 당신은 몇 살까지 산다고 해?"

"82살까지 래요 "

"겨우 82까지만?"

마누라는 그게 마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나 되는 것처럼 믿고 있는 듯하다.

"내 먼저 죽으면 젊은 여자 만나서 잘살겠네요?"

다소 빈정대는듯한 투로 말했다.

"새장가가려면 다 늙어서 누가 시집오겠나? 지금이라면 몰라도".

"그럼 지금 내가 없어지면 좋겠네?".

"응".

갑자기 마누라 표정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무언가 주섬주섬 챙기더니 휑하니 나가 버렸다.

미처, 농담이라고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덕분에 그날 저녁은 손수 끓인 라면으로 때우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 나는 120은 몰라도 100살 까지는 살 거라고 찰떡같이 믿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이런 내 생각을 깡그리 뒤집어 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삼시세끼 꼭꼭 찾아먹는 삼식이가 되었지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배가 빵빵해지도록 먹는 게 거의 습관으로 되어 있었다.

며칠 전 친구의 초청으로 저녁회식을 하게 되었는데,

모처럼 좋아하는 생선회에 다가 매운탕까지 거나하게 먹고 마시고 나니 친구에게 미안한 김에 커피 한잔 하자며 고급 커피숖에 들어가 이름도 잘 모르는 무슨 라땐가 하는 커피 한잔씩 시켰다.

값도 값이지만 양이 왜 그렇게 많은지 그냥 남기기 아까워 꿀꺽꿀꺽 다 마시고서야 헤어졌다.

그러고서도 언제나처럼 애들이 선물로 사다준 견과류(땅콩 아몬드등)를 심심풀이로 씹으며 잠들었다.

그런데 간밤에 갑자기 메스껍고 속이 더부룩하며 견딜 수가 없었다. 변기를 끌어안고 목구멍 깊숙히 손가락을 집어넣어 봐도 소용없었다 급기야 명치가 불에 댄 것처럼 따갑기까지 했다.

이튿날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역류성식도염이란다.

2주가 넘었는데도 좀처럼 나을 기미가 없다. 이제 늙어서 괄약근이 약해져서 그렇단다.

혹시 죽을병이 아닌지 은근 걱정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밤 갑자기 열이 나고 목이 부어 말소리도 안 나오고 창자를 뽑아낼 것 같은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제 나도 죽을 때가 되었나 보다. 언젠가 사람이 죽을 때는 기침을 동반한다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것으로 내 인생은 끝나는가 보다.

마누라를 급히 불렀다. 말도 못 하고 손짓으로만 허우적대는 걸보고

"왜 그래요?" 하고 다급하게 묻는다.

"나 죽으려나 보다".


아직 문도 열지 않은 병원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니 온갖 회한이 밀려왔다.

입을 벌리고 목구멍을 들여다본 내과의사는 어딘가 전화를 걸더니 이비인후과로 보냈다.

내시경으로 목구멍 깊숙이 이리저리 쑤시고 살피며 빵빵한 배를 쿡쿡. 찔러보더니 급성독감인 거 같으니 주사 맞고 약 먹어 보라고 했다.

주사 한 대 맞고 약처방받아 마누라가 끓여주는 미음 먹고 한이틀 드러누워 지나니 목도 좀 트이고 기침도 잦아진 거 같았다.

"이제 좀 어때요?"

마누라에게 괜히 호들갑을 떨었던 게 미안하기도 하여,

"죽는 줄 알았잖아?"

하며 멋쩍게 웃고 말았다.

그놈의 독감 때문에 식도염이 언제 걸렸던가 싶게 잊어버렸는데, 독감기운이 슬슬 사라지니 식도염 증상이 되살아 나기 시작했다.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 말이 있지만, 이젠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친구들 만나면 유독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들을땐 괜히 어깨가 으쓱해 지곤 했는데, 몸이 한번 나빠지니 연속 병마가 달려든다. 변비가 걸리질 않나, 다 나은 감기가 재발하지를 않나, 귀도 먹먹해진 것 같고. 눈도 침침해진 것 같다. 모처럼 거울을 들여다본 내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치, 귀신에게 끌려가다 탈출한 거 같은 몰골이다.

앞으로는 입이 달라고 보채 더라도 적당히 달래 주고, 다리가 귀찮다고 하더라도 꼬셔서 데리고 나가고 하여, 내년에는 내시경 검사도 받아보고 엠알아이도 찍어 봐야겠다.

2024,12 돌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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