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나의 아빠

무책임성의 연결고리

아빠, 아빠덕에 유년기를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이 불안하게 커온 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아빠를 싫어하지 않고 좋아해. 그러니까 아빠는 이제는 울부짖을 힘도 없는 아줌마가 된 딸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해주면 돼.

언니와 4살 터울로 둘째 딸로 태어난 난, 언니와는 다르게 부모의 관계가 그나마 안정적이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울 때 생겨서 인지, 엄마의 임신 때부터 아빠는 엄마에게 매일 과일을 사다 먹였다. 언니가 태어났을 때는 아빠도 외할머니도 외면해 엄마는 쓸쓸했지만, 내가 태어났을 때는 가족들의 환영 속에서 태어나 정말 기뻤다고. 사랑 속에서 태어난 나는 아빠에게도 사랑받아 아빠는 둘째 딸 한정 '딸바보'였다. 비결은 아직 돌 안된 신생아가 아빠를 보더니 방긋 웃었다, 그 순간을 아빠는 잊지 못한다고. 내가 처음으로 말한 단어도 "엄마"가 아닌 "아빠"였다. 둘째 딸바보인 아빠와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는 딸. 그래서 아빠는 마트만 가면 간식이나 장난감 앞에 서서 사달라고 떼쓰는 어린아이를 혼내지 않고 사줬다. 엄마는 아빠가 나를 너무 이뻐해 내가 버릇이 없어졌다고, 그때 잡지 못한 것을 한탄을 한다. "이 여시~" 경상도에서는 여우를 여시라고 부르는데, 아빠한테 갖은 애교를 부리며 원하는 걸 얻어내는 나를 보고, 아빠는 종종 여시라고 불렀다. 어린 마음에도 애정이 담긴 단어라는 걸 알아서 그 단어가 좋았다.

사랑을 많이 받은 난 호기심이 많고 장난기가 많았다. 장난은 가끔은 도를 넘어 사고가 되었고 화를 입었다.

그날 저녁, 부모는 거실에서 나란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왔으니 많이 피곤하고 고단 했겠지, 특히 건축현장일이니. 소주를 까고 닭강정을 집으며 세상 한풀이를 하고 있었다.

눈치가 없는 나는 아빠가 좋았고, 아빠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다. 그래서 내 공주머리띠를 아빠에게 씌웠다. 장난~ 사랑해 줘. 아빠한테 버릇없이 굴어도 아빠는 봐주니까.

근데 그날은 아니었다.

건장한 남자의 거대한 손바닥으로 5살 여자아이의 뺨을 날려 버렸다. 얼마나 진하게 찍혔는지, 아이의 말랑한 뺨에 새겨진 빨간 손바닥과 손가락 도장은 한참 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아이는 발악하듯 부모를 향해 울어대었다. 부모는 아이를 외면했고 신나게 술을 마셨다.

기억이라는 게 존재하는 시점부터 부모는 싸우고 있었다. 대부분 일방적으로 엄마가 아빠에게 욕먹고 맞고 쫓겨나는 거였지만. 아빠가 무서워서 기어가는 목소리로 무조건 미안하다고만 하는 엄마가 너무 불쌍했다. 아빠는 왜 이렇게 엄마를 못살게 굴까?

짐승의 숨소리가 들리고 거실이 섬뜩해지면 아직 학교도 들어가기도 전인 어린 자매는 방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가 같이 이불을 둘러쓰고 숨소리를 죽였다. 하지만 운이 없는 날엔 어린 자매가 숨어든 방문까지 들이 닫쳐 세 모녀를 내쫓았다. 짐승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면 열쇠를 슬슬 몰래 챙기는 버릇이 들었다. 언제든 쫓겨날 때를 준비해야 하니까, 밖에서 몇 시간을 배회하다 보면 짐승에서 아빠로 돌아오고 그때 챙겨둔 열쇠로 다시 집문을 열 수 있었다.

어느 날, 쫓겨나게 될 운명이었던 난 열쇠를 챙기며 이런 내 운명이 괜스레 한탄스러운 것이다. 짐승의 집을 나오는데 조심스레 현관문을 닫지는 못할 망정,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아 버렸다. 그게 짐승의 코털을 건드리고 만 것이다.

아파트 공동현관문을 나오는데 화분이 머리 앞으로 떨어져 와장창 깨졌다. 한보만 더 걸었으면 바로 머리에 맞았을 위치이다. 위를 쳐다보니 짐승이 보였다. 베란다에는 화분들이 많았다. 아빠는 매일 화분에 물을 주었고 거기서 담배를 피웠고 책을 읽었다.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다. 11살, 그때는 아빠방에 컴퓨터가 있었다. 점점 부모싸움이 뜸해지고는 있었지만 사춘기가 점점 올 때여서일까 아빠를 싫어했는지 증오했는지. 에이포용지더미가 책상 위에 쌓여 있었는데 종이를 하나 꺼내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썼다. 그리고 그 종이를 다시 에이포용지더미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런데 다음날, 그 종이가 에이포용지더미 제일 위에 올라와져 있었다. 아빠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냥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갔다. 아빠는 아마 봤을 것이고, 어린 나는 미안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 종이를 구개서 버렸다.

할머니는 어디에 있나.

아빠는 명절을 싫어했다. 명절만 되면 짐승이 종종 나타났고 그래서 부모와 형제가 있는 엄마는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없었다. 3살 때 병원에 버려진 아빠는 친모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 있다고 한다. 고아원에 있을 땐 밤마다 울면서 친모를 기다렸다고 한다. 가족 찾기에도 아빠 DNA를 제공했다는데 친모는 아빠를 찾을 생각이 없나 보다.

기차역 앞에서 잃어버린 할머니를 찾을뻔한 웃지 못할 일화가 있었다. 외가를 가던 길이었는데 한 할머니가 아빠를 갑자기 잡더니 "동수야!" 하는 것이다. 동수가 누구? 우리 가족은 일동 당황이었다. 그중 아빠가 제일 당황이었겠지. 하지만 그것도 찰나, "아이고야! 죄송합니다~ 내 우리 애인 줄 알고 헷갈렸네." 하며 가던 길을 가시는 거다. 아빠는 허탈웃음. 세 모녀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아빠는 외가 가던 길 내내 별일이 다 있다며 조잘조잘 엄마에게 얘기를 하는데, 설레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