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피폐한 로맨스
그 말에 갑자기 나도 목이 말라 음료수만 벌컥벌컥 마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난 그냥 먹버 당한 거지. 뭐.”
“먹버...?”
“아 맞다. 공부만 해서 세상 물정은 전혀 모르는 우리의 순진한 오빠를 위해서 먹버가 뭔지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어야겠네.”
“그만해. 그런 조롱은 그만큼 했으면 된 거 아냐.”
솔직히 조현영의 말은 굉장히 기분 나빴다.
가만 보면 그녀는 직설적으로 날 비난하기도 했지만.
이런 식으로 은근 돌려까기도 잘했다.
“먹버는 ‘먹고 버린다’란 말의 줄임말이야.”
“먹고 버린다고?”
“응. 오빠도 많이 해봐서 잘 알 텐데...”
“무슨 소리야?”
“오빠도 여자랑 자고 뻥 차 버리고... 내가 널 언제 봤냐 하는...”
“현영아. 재미없으니까. 그만해.”
조현영은 자신이 아닌 지소영을 더 염두에 두고 있는
내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계속 날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 인간... 오빠랑 나이도 비슷한데... 누구는 회사에서 언제 짤릴지 몰라 안절부절 불안에 떠는 대리고, 누구는 지금은 그룹 부사장이고 조금 있으면 그룹 전체의 회장이 될...”
“그만해라!”
“왜? 오빠의 현실을 알려주니까, 싫어?”
“...”
그녀는 날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럴 일은 전혀 없을테지만, 혹시라도 그 미친년하고 오빠가 결혼했다고 쳐.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건데? 월급쟁이로 쭉 살던 오빠가 장사를 할 거야? 아니면 사업을 할 거야? 아니 한다고 해도 자본금은 있어. 돈이 있어야 장사를 하든 사업을 하든 할 거 아냐...”
“흠흠흠...”
“그런데 나랑 결혼하면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그냥 그 뭣같은 회사 바로 때려치우고 나랑 인생을 즐기며 사는 거야. 얼마나 좋아.”
“흐음... 흠흠흠...”
난 계속 헛기침만 할 수밖에 없었다.
조현영이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내성적인 성격이 아직도 강한 나다.
물론 그걸 고치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지만.
근본 자체가 내성적인 내 성격이 확 바뀌기 힘들었다.
장사나 사업을 하려면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보다도 더
간이고 쓸개고 내놓고 살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난 쓸데없이 자존심도 굉장히 쎈 편이다.
남들에게 머리를 억지로 숙이는 것도 솔직히 쉽지 않았다.
직장에 다니며 내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했었던
그 수많은 아부성 말과 행동도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쉽지 않았다.
그냥 마음을 내던지고 가식의 가면을 쓰고 살았다.
그래서 괴로웠고 그 덕분에 술담배만 엄청 늘었다.
그런 면에서 지금 조현영이 내게 하는 말은 굉장히 현실적인 말이었다.
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모두 맞는 말뿐이었으니까.
지금 내 상황에서 지소영과 결혼을 한다고 해도...
솔직히 금전적으로 행복하게 해줄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오빠가 그렇게 순결을 따진다면...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다고?”
“응. 결혼은 나랑 하고... 그 미친년은 첩처럼 살게 하면 되겠네... 가끔 가다 생각나면 오빠가 심심풀이 땅콩처럼... 큭큭큭.”
“무슨 말도 안되는...”
내가 말이 없자.
조현영은 애가 탔는지 더 파격적인 조건을 내게 꺼냈다.
난 조현영의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무시하려 했다.
솔직히 이건 전혀 말이 안 된다.
엄마와 작은엄마가 아버지 때문에 어떤 불행을 겪는지
옆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 본 나다.
지금 조현영이 내게 하는 말은
장난이라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아냐, 난 진심이야.”
“...”
“오빠도 지금 내 앞에서 고민하는 걸 보면... 그 미친년을 절대 포기하지 못할 거 같이 보여. 그렇다고 내가 오빠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 말이 안 돼!”
“왜 안되는데?”
“만약, 내가 소영이랑 결혼하고 널 첩으로 삼는다면... 넌 그래도 그걸 인정할 수 있겠어?”
“당연히 안되지. 내가 왜 그딴 말도 안 되는...”
역시나 내가 생각했던 당연한 반응이었다.
누가 남의 첩살이를 하고 싶어 하겠나.
자기도 할 수 없는 걸 왜 소영이에게 시키려 하나.
이건 분명 나와 결혼하려고 말도 안되는 술수를 펼치는 것 일 뿐이다.
“그것 봐. 너도 싫다면서... 그럼 소영이를 첩으로 삼으란 것도 전혀 말이 안 되는 거잖아.”
“잠시만... 기다려 봐...”
조현영은 자기 논리가 밀린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큭큭큭...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걸 빼 먹었네.”
“그게 뭔데?”
“난 첩이 될 수 없지만... 그 미친년은 첩이 될 수 있는 이유...”
“그게 뭔데?”
“그 미친년에게는 없는 우리 집의 막대한 재산...”
“...”
조현영은 엄청 황당해하는 내 모습을 보며
오히려 자신의 제안이 맞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나랑 결혼하면 오빤 지금 다니고 있는 그 개떡 같은 회사를 당장 때려 치울 수 있어.”
“...”
“남 밑에서 설움이나 받으며 윗사람 아랫사람 안 따지고 눈치나 보고 살 필요가 전혀 없지. 안 그래?”
“그렇긴... 하지...”
반박 할 수 없이 다 맞는 말이다.
지소영 집안은 내가 평생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엄청 난 재산을 가지고 있으니까.
“사실 남자들이 죽기보다 싫은 회사에 굳이 나가는 이유가 뭐겠어?”
“...”
“다 처자식 먹여 살리려는 거 아냐? 회사에서 따박따박 주는 월급 때문에...”
“...”
“그래서 회사에서 잘리지 않으려고 윗사람, 아랫사람 안 따지고 비굴하게 굽신거리고 아부나 하고...”
“넌 회사를 다녀 본 적도 없으면서 그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내 말에 조현영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후우... 맞아. 난 회사를 단 하루도 다녀 보진 않았지만. 오빠 덕분에 알 게 된 것도 있고. 결정적으로 우리 집에 꼼짝 못하는 성호 오빠 집안을 보면 알 수 있지.”
“...”
“성호 오빠나 아저씨가 괜히 우리 집에 굽신 거리겠어? 다 우리 집에서 주는 돈 때문에 참는 거지.”
“그건 잘 아네...”
사실 여기에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성호랑 아저씨를 못살게 괴롭히냐?’라고
덧붙여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사실 성호 그 자식은
조현영과 조현영 아버지가 내게 했던 거짓말처럼 용서가 안된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 자식에게 달려가.
조현영이 내게 했던 말이 전부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현영이가 했던 말이 다 맞다면...
흥분한 내가 놈에게 어떤 행동을 하게 될 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랑 우선 결혼해.”
“...”
“그럼 오빠가 가진 그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돈만 있으면 이 세상은 사실 크게 문제 될 게 거의 없거든. 훗훗훗.”
“...”
41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