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피폐한 로맨스
조현영의 말을 반박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란 것이 너무 슬펐다.
“난 오빠에게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을 모두 다 말했어.”
“.,.”
“여기서 더 좋은 조건이란 있을 수 없어. 그건 오빠가 가장 잘 알 거야.”
“생각할... 시간을... 내게 좀 줘...”
난 조현영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아니다.
정확히는 조현영 집안이 가진 돈에 굴복한 것이다.
“훗훗... 우리 그냥 편하게 살아. 우리가 결혼해도 내가 오빠에게 여자 문제로 압박하거나 강요하지 않을 테니까.”
“...”
“내가 가진 돈으로 그 미친년 하고도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야. 아니지. 그 미친년뿐만 아니라. 오빠가 원하면 다른 년 하고 붙어먹어도 괜찮아.”
“...”
“그 대신, 나에게도 남자 문제로 압박하거나 강요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그럼 완벽하잖아.”
“그런 결혼이 무슨 의미가 있어?”
“왜 의미가 없어. 외롭고 힘들 때. 누군가 옆에 꼭 있어 주었으면 할 때... 그땐 서로에게 도움이 되면 되는 거지.”
“그건 말도 안 되는...”
난 조현영의 말을 반박하려다.
갑자기 아버지와 작은 엄마...
그리고 엄마와 엄마랑 함께 살고 있는 남자가 생각났다.
조현영이 말한 그런 말도 안 되는 개막장 결혼 생활을
지금 나의 부모가 하고 있다.
“후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그런 게 어디 있냐고 조현영을 비난해야 하지만.
그러면 내 부모와 부모의 불륜남, 불륜녀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조현영이 말한 그 엉망인 가족관계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에게 엄연히 존재한다.
“오빠, 그런 한숨을 그만 쉬고... 우리 한판 더 할래?”
“한판 더 하긴... 뭘 더해?”
“에이... 다 알면서... 그러지 말고...”
“아앗...”
조현영이 내 가슴 쪽으로 덮쳤는데 내 가슴이 뭐에 쓸린 것처럼 아팠다.
“내가 심하게 한 것도 아닌데... 어랏... 오빠, 이 상처는 다... 뭐야?”
조현영은 내 가슴을 유심히 살폈다.
이건 지소영과 사랑을 나누고 난 뒤.
그녀가 장난스럽게 깨물다가 생긴 상처였다.
처음에는 살짝살짝 깨물더니 나중에는 조금 강하게 깨물어.
결국 이런 작은 상처들이 남은 것이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괜찮긴... 남의 남자에게 이게 무슨 짓이야?”
“괜찮다니까 그러네...”
“그러지 말고 오빤, 가만있어 봐.”
조현영은 내 가슴에 있는 상처를 자세히 보더니 경악했다.
“뭐야? 이 미친년이 정말 미쳤나? 이빨 자국에... 멍까지... 어휴 속상해.”
“괜찮다니까...”
“가만있어. 내가 괜찮지 않으니까.”
조현영은 얼른 룸서비스로 소독약과 밴드 종류를 주문했다.
생각보다 금방 배달된 소독약과 밴드로 내 가슴을 소독해 주고 밴드를 붙여 주었다.
그걸 보니...
조현영의 참 자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나 엄마는 내가 다치거나 상처를 입어도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내가 알아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라고 거의 방치했었으니까.
그나마 아버지는 내게 작은 엄마를 과외 선생님으로 붙여줘.
공부를 시킨 것 외에는 다른 걸 해준 게 솔직히 없었다.
그런데 조현영은 아무것도 아닌 내 상처에 대해
진짜 열성적으로 돌봐주었다.
“그 미친년은 순결을 오빠에게 주었다더니... 이런 미친 짓은 어디서 배운 거야?!!”
“흥분해서 그랬나 봐.”
“어떤 미친년이 흥분했다고 이렇게 상처를 남겨. 그것도 내 남편 될 사람에게...”
“...”
빈말이라도 지금 조현영이 하는 말은 내가 큰 위로가 되었다.
이런 걸 바란 건 아닌데...
조현영이 이상하게 다시 보인다.
“어후, 진짜 속상해 죽겠네. 그 미친년이 오빠를 미친 듯이 깨물었다는 거 아냐.”
“난 괜찮아...”
“괜찮긴... 오빠 몸에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일단 생기면... 난 너무 속상해!”
“그래, 고맙다. 현영아... 이리 와!”
“어멋!!!”
난 내가 할 수 있는 고마움의 표시를
현영이에게 아주 화끈하게 했다.
그렇게 우리 둘의 시간은 흘러갔다...
**
조현영을 조현영 아버지가 있는 병원에 데려다준 후.
성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사이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주 많다.
“응, 성근아 말해?”
“지금 어디니?”
“어디긴...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지.”
“그래?”
성호와 통화하는 내 목소리는 내가 느끼기에도 굉장히 차가웠다.
“너... 무슨 일 있냐?”
“응. 아주 많아. 그것도 너랑 관련된 거라서 말이야.”
그러다 내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고 있었다.
차갑던 목소리가 이젠 분노로 이글거렸다.
“지금... 꼭 날 봐야... 하는 거야?”
“난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알았어. 그럼 우리 만나서 점심이나 같이 먹자.”
“글쎄다... 밥이 목구멍으로 잘 넘어갈지... 난 잘 모르겠는데...”
내 목소리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너... 혹시... 현영이 만났니?”
“응.”
“현영이한테서... 무슨 말을... 들은 거야?”
“응. 특히 너에 대한 말을 아주 많이 들었어.”
“그... 그렇구나... 그럼 어쩔 수 없네.”
아무리 성호가 지금 내 상황을 무시하려 해도
그냥 넘기기는 힘들 것이다.
“알았어... 그럼 이리 와. 여긴...”
서성호는 내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난 화가 많이 나거나 나 자신이 주체가 안 될 땐.
웬만하면 운전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까지 깨고
성호를 만나러 차를 몰았다.
차를 운전하면서 현영이가 해준 말이 자꾸 떠올랐다.
머릿속으로는 서성호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현영이가 말할 때... 핸드폰으로 녹음이라도 할 걸, 잘못한 거 같은데...”
난 급격하게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럴 수 없었다.
서로 알몸인 상태에서 핸드폰으로 녹음을 한다는 건.
절대 불가능했으니까.
그럼 성호가 조현영이 한 말에 대해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한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나?
바보처럼 멍하니 있다가 조현영에게 전화라도 걸어 확인해야 하나?
아니면 나와 성호, 그리고 조현영 3명이 모두 모여 진실게임이라도 해야 하나?
머리가 복잡해졌다.
난 성호가 조현영이 내게 한 말에 대해
나에게 반응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가장 효율적으로 서성호에게 진실을 알아낼 방법을 말이다.
그렇게 성호를 만나기까지 모든 상황에 대해 초집중하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때 저 멀리 성호가 보였다.
분명 반가워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내 안에 있는 악마가 속삭였다.
‘그냥 놈을 차로 밀어 버려... 놈은 버러지 같은 놈이야. 인간이 아니라고..’
나도 모르게 내 속에 존재하는 악마의 목소리에 호응했다.
성호가 있는 곳을 향해 의도적으로 엑셀을 강하게 밟았다.
끼이이익...
42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