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피폐한 로맨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조현영은 내 몸 위에서 흘렀다.
우린 그렇게 서로의 몸을 뜨겁게 감싸안았다.
불과 몇 시간 전.
지소영과 뜨겁게 몸을 섞던 나였는데...
그리고 그녀가 오랜 친구인 김미숙을 단번에 정리했던 것처럼
조현영도 그렇게 정리하겠다고 호기롭게 말했던 나였는데...
그런 약속이 모두 헛되어 버리고.
헤어져야 마땅한 조현영과는 이렇게 몸을 섞고 말았다.
아버지가 두 엄마와 지키지 못했던 그 허망한 약속처럼.
나 또한 그랬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난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그런 놈이다.
이건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었다.
여성 편력이 너무 심했으니까...
아니지 아버지보다 내가 더 심한 여성 편력을 가지고 있는 거다.
후우...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것도 아니다.
난 아버지처럼 여성 편력이 심한 게 아니라.
그냥 모든 여자에게 미친 놈이다.
그래 그게 정답이다.
편향된 건 아무것도 없다.
여자이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인...
그냥 색마...
지소영과 허리가 아플 정도로 몸을 섞고도
지금 조현영과 또 몸을 섞는다.
이미 난 본능에 눈이 먼 상태였다.
아무리 잃어버린 이성을 찾으려고 해도
조현영이 주는 이 격정적 쾌감 때문인지
그 어디에서도 이성적 사고는 찾을 수 없었다.
후우...
난 그냥... 그런 놈이다.
영원히 구제받을 수 없는 색골. 색마...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 몸 위에 있던 그녀의
뜨거운 입김도 점점 사그라졌다.
용암처럼 뜨겁기만 했던
우리의 몸도 점차 식어갔다.
조현영은 내게 바짝 기대에
이젠 평온을 되찾아 가야 하는 것 때문인지
아쉬움을 달래려 내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날 두고 지소영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다는 듯
그녀는 내게 자랑스럽게 물었다.
“뭘... 말하는 건지...”
하지만 난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에이. 뭐긴 뭐야? 그 미친년하고 나 사이에서 누굴 선택할 거냐는 거지.”
“그건 말이야...”
지금 아무리 조현영과 이런 상황이 벌어졌어도
불과 몇 시간 전.
난 지소영과 분명히 약속했다.
첫 순결을 나에게 준 그녀를 꼭 선택하겠다고...
난 그런 지소영의 기대를 저버리면 안된다.
거기다 지소영의 가장 친한 친구인 김미숙까지
내가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앞에서 우리 사이에 끼어들면 절교를 하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거기에 비하면
조현영은 내게 계속 거짓말만 했고
그녀의 살아온 품행 또한 평생을 함께할 여자로는 굉장히 부적합했다.
‘그래. 맞아. 아무리 내가 너와 이런식으로 육체관계를 또 맺었어도, 거짓말쟁이와는 평생을 살 수 없지.’
분명하고 단호하게 내 생각을 조현영에게 말하려고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당연히 나지. 그건 물어보나 마나 아니겠어. 큭큭큭.”
그러나 그녀는 내가 답할 기회를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문자답...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여자.
그렇다면 내 의견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인데...
이미 결론을 낸 상태면서 내게는 왜 묻는 걸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여자다.
“오빠가 순결에 대해 말하니까. 내가 순결을 주었던 그 자식이 갑자기 생각나네.”
“...”
“우리나라에서 아주 잘 나가는... 지금은 부사장이 되어 있던데...”
“누군지 물어도 될까?”
“알려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얼마 전에는 텔레비전에 수도 없이 나왔으니까.”
난 조현영이 말하는 자가 누군지 굳이 그녀의 입을 통하지 않고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요새 경영 수업에 정신이 없다는 재벌 4세가 떠 올랐다.
우리나라 재벌 4세들 중에서는 최초로
부사장 타이틀을 달고 회사 경영 전반에 이름을 알렸다는...
“오빠는 누군지 아는 눈치네.”
“당연하지. 그 정도만 말해도 우리나라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 알텐데...”
“후우...”
조현영은 내 말을 듣자마자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오빠는 우리나라에 최고 부자들이 몇명이나 될 거 같아?”
“글쎄... 나야 그런 건 잘 모르지.”
“한 만 명 정도 있다고 해볼까?”
“만 명?”
“응.”
조현영은 갑자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나도 그런 조현영을 따라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조현영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리고 넋두리를 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집도 좀 살잖아. 그런데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가 있어. 어린이집, 유치원, 초중고. 대학교 유학까지... 그들끼리 아주 어릴 적부터 서로 어울리게 해서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만들고 ... 그래서 그들끼리만 결혼할 수 있도록 말이야. 심지어 사교 파티도 그들끼리만 해.”
“그래? 뭐 그들이야 돈이 많으니까. 돈 많은 사람들끼리 이어져야 나중에도 좋을테니... 그럴수 밖에 없긴 하겠네.”
조현영은 날 잠깐 노려 보았다.
“우리 부모님도 내가 그들과 어릴 적부터 함께 어울려 그들 중 하나와 결혼하길 바랬지.”
“그들끼리 논다면서?”
“응. 그런데 우리 집처럼 어중간한 사람들도 있거든. 분명 잘 살긴 하는데 재벌보단 못한...그래서 그들과 잘하면 연결이 될 수도 있을 거 같은... 뭐 그런 거 말이야.”
“그래서 그들이 커가는 코스를 그대로...”
“응.”
재벌들 노는 곳에 낄 정도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조현영을 보니.
그녀 집안에는 돈이 진짜 많긴 많은 거 같았다.
“그때, 좀 잘 하지 그랬어. 그럼 나 같은 거렁뱅이는 안 만나도 되잖아.”
“오빠, 그런 식으로 비아냥거리지 좀 마...”
“내가 뭘. 그냥 잘 되었으면 좋았겠다고 하는 건데.”
“하여튼, 그때 그렇게 만난 그놈에게 내 첫 순결을 주었지. 아마 그때가 내가 21살 무렵이었을 거야... 그땐 나도 재벌 남편을 두는가 싶어. 가슴이 쿵쿵 거렸지...”
조현영은 그 이야기를 하더니
갑자기 소파 탁자로 가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오빠도 하나 줄까?”
“응...”
그녀는 음료수를 가져와 나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때 좀 잘하지... 왜 헤어진 거야?”
“훗훗... 글쎄 말이야... 나도 그때 좀 잘 했어야 했는데...”
조현영은 음료수를 천천히 마셨다.
“나 말고도... 나 같은 생각으로 접근했던 애들이... 정말 거짓말 조금도 안 보태고.. 한 트럭이더라고.”
“그렇게나 많았어?”
“응. 오빠가 지금까지 같이 잔 여자들과는 비교조차 안 되지.”
40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