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피폐한 로맨스
서성호 이 자식은... 분명 날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고 놀고 있었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왜 그럴까?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고...
내가 호스트 바에서 일하던 더러운 서성호 앞에서 왜 이리 무기력했는지 정말 모르겠단 말이야!
“성근아, 넌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생각해?”
서성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미 날 충분히 압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이다. 놈은 모르는 게 있다.
아무리 놈이 나에게 이렇게 나와도 난 절대 서성호를 인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놈은 인간 말종으로 질이 아주 나쁜 놈이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놈은 나에게 아주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다.
나쁜 놈...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
“내가 왜? 굳이 꼭, 너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야 하는 거지?”
서성호는 내 말에 순간적으로 미간이 격하게 움직였다.
놈도 바보는 아니다.
내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놈도 아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하아... 너도 결국은 재수 없는 조 씨 집안사람들처럼 날 언제나 무시하는구나.”
“무시...?”
“그래. 무시지. 그럼 지금 나에 대한 이 태도는 뭔데?”
“...”
당연히 맞는 말이다.
난 놈을 더 악랄하게 무시하고 싶다.
놈은 그런 대접을 받아도 싼 놈이다.
감히 날 이용하려 한 놈.
그런 놈에게 지금 나의 태도는 오히려 너무 자비로운 것일지도 모른다.
“항상 보면 그래. 넌 내 말은 언제나 은근히 무시하더라... 아니지 은근이 아니라, 이렇게 항상 대놓고 무시하잖아.”
“그래서... 기분 나빠?”
“뭐라고?”
성호는 내 말에 몹시 화가 나 보였다.
평소 내게 아무리 화가 나도 이렇게까지 반응한 적이 거의 없던 성호였지만.
오늘은 놈이 날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달랐다.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놈과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판을 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런 놈과 계속 엮여 피곤해진다.
성호는 자신이 평소에도 내게 심한 무시를 당한 것에 대해 그동안 제대로 풀지 못했다.
그렇게 쌓아 놓았던 나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이 끝내 폭발하고 만 거 같았다.
“지금도 그렇잖아! 넌 내가 왜, 가출을 해야 했고, 호스트 바에서 일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어.”
“솔직히 말해서... 나랑은 크게 상관없는 말이잖아.”
난 일부러 놈의 화를 더 돋웠다.
놈은 화를 주체하지 못해야 한다.
그래야 그동안 날 속이고 진실을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전부 꺼내 놓을 테니까.
난 진실이 필요했고 그래서 나 나름의 판을 깔고 있었다.
“넌 그냥 조현영한테 들었던 나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진짜였는지, 내 입을 통해 확인만 하려는 거잖아. 안 그래? 내 말이 틀렸냐고?”
“그래. 그건 사실이야.”
내 작전이 통하는지 놈은 엄청 흥분해, 진실을 말하려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서성호가 군대도 나오지 않았고, 특히나 대학도 나오지 않았다는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닌 성호, 본인의 입을 통해 직접 확인하게 되니.
은근히 그런 성호를 더욱 무시하고 깔보게 된 건 사실이었다.
거기다 놈은 호스트바에서 일한 놈이다.
“성근아, 너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가... 혹시 기억 안 나?”
“글쎄... 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하아... 그러시겠지... 넌 언제나 술에 잔뜩 취해 있었으니까.”
그랬다.
따지고 보니 서성호를 언제 처음 만났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어쩌다 만났고 놈을 만나면 항상 여자와 잠을 잤다.
그래서 난 놈이 필요했고 당연히 친해졌다.
그래 그동안 그렇게만 단순하게만 생각했는데...
진짜 성호와 정확히 언제 만난 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내가 그걸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게 무슨 큰 문제인데?
솔직히 말해 그렇게 크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놈은 내게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버러지 같은 놈이다.
군대도 안 갔어, 대학도 안나 왔으면서.
내겐 아주 태연하게 군대도 다녀왔고 대학도 나왔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했던 서성호다.
내가 왜 이런 놈과 처음 만난 것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잖아.
난 성호에 대해 잘 알 필요가 전혀 없다.
그냥 나와 관련된 것만 이놈의 입을 통해 다 확인하고 나면.
그땐 돈을 벌기 위해 여자들에게 비굴한 웃음이나 팔던
이딴 더러운 놈과는 영원히 헤어지는 게 맞다.
다시는 널 보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하늘에 대고 맹세한다.
널 절대 이 순간 이후로는 다시 보지 않겠다고...
“성호야, 쓸데없는 말은 이제 그만하고, 어서 나에게 접근한 이유나 확실하게 설명해.”
“그래, 알았다. 알았다고.”
성호는 내 쌀쌀한 말투에 몹시 실망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다, 그동안 나에게 진실이 아닌 거짓말만 한 성호의 업보다.
성호 입장에서야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친구로 지낸 시간이 제법 되는데.
그걸 내가 모두 부정하는 것 같으니까. 인간적인 배신감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소에 잘했어야지!
성호는 잠시 말이 없다가 힘없이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놈의 이야기는 이랬다.
.
.
.
날 만나기 얼마 전.
현영이 엄마가 자신에게 갑자기 서울대를 다니거나 졸업한 남자를 데려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성호가 배움이 짧아서 서울대 나온 사람은커녕 대학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 주변에 전혀 없었다는 거였다.
하긴 가출을 해 정규 교육도 제대로 밟지 못한 성호다.
그런 성호가 대학을 나온 친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나 같이 서울대를 나온 사람을 만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현영이 엄마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이 원하는 남자를 왜 빨리 데리고 오지 않냐고 엄청나게 쪼았다고 한다
“그땐 솔직히... 왜 그런 일을 내게 시키는지 잘 몰랐어. 지금이야. 그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지만 말이야.”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 성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고?”
“그래. 그냥 날 철저하게 괴롭히려는 목적인 거였지.”
성호는 담배 연기를 하늘을 향해 연신 뿜었다.
놈을 괴롭히는 게 목적이라니...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응, 내가 대학 안 나온 걸 뻔히 알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킨 이유는... 아주 간단해.”
“그게 뭔데?”
좋은 일은 분명 아닐 텐데. 난 그 이유가 너무 궁금했다.
“현영이 엄마란 년의 더러운 제안을... 내가 거절했거든.”
“그 제안이라는 게... 혹시... 같이 자는...”
“그래. 맞아... 아주 역겨운 제안이었지.”
성호는 말을 하면서도 몹시 괴로워했다.
절대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을 들킨 것처럼.
“너 혹시... 그전에도 그런 제안을 받았던 거야?”
“맞아. 그랬지. 내가 호스트 바에서 일하는 걸 빌미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그런데 갑자기 싫더라. 그래서 싫다고 했더니.. 그런 비겁한 복수를 한 거지.”
“...”
“그런데 그때 하늘에서 널 보내 준 거지.”
성호의 눈빛이 다시 날카롭게 빛났다.
난 성호의 그 날카로운 눈매를 보며 섬뜩함을 느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로 괴로워 미칠 것 같았는데.
갑자기 자신이 절대 찾을 수 없던 서울대를 나온 사람이.
자기 눈앞에 기적처럼 나타났다는 거였다.
“내... 내가 서울대를 나왔다는 걸... 넌 어떻게 안 거야? 그것도 내 뒷조사로 알아낸 거야?”
“천만에!”
놈의 눈은 점점 힘이 들어갔다.
“너 정말 술에 잔뜩 취해 그때 생각이 하나도 안 나는가 보구나?”
“으... 응...”
내 대답에 성호의 입꼬리가 심하게 올라간다.
이건 분명 날 비웃는 거였다.
나쁜 자식...
“내가 어떻게 했는데?”
나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놈은 아주 친절하고 잔인하게 그때의 상황을 모두 말해주었다.
그때의 난 이런 행동을 했다고 했다.
다른 곳에서 이미 술을 많이 마셨는지 술에 떡이 되어 들어온 내가.
알지도 못하는 처음 본 여자들이 있는 탁자 위에 서울대 학생증을 올려놓고는,
서울대 나온 자기와 사귀지 않겠냐고 했다는 거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 수법은 굉장히 유치하긴 했다. 그치?”
“내... 내가 진짜 그랬다고?”
“그래. 그러니까. 네가 서울대 나온 걸 알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냐?”
“...”
성호에게 말만 들었는데도 굉장히 부끄러웠다.
내가 왜 그딴 낯 뜨거운 행동을 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이미 술에 떡이 되어 성호가 있던 술집에 들어온 내가.
처음 보는 여자들에게 서울대 학생증을 보여주면서 생전 처음 집적거렸다는 건데...
내가 왜 그랬을까...
하아...
나도 모르게 한숨만 나왔다.
나란 놈은 여자를 밝혀도 너무 밝히는 그런 놈이다.
“그땐 내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조현영 엄마란 년에게 고통받고 있으니까. 하늘에서 날 불쌍하게 여겨 보내준 선물 같은 존재로 널 생각했었지... 그땐 말이야. 그땐 그랬어.”
놈은 또다시 날 조롱했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내가 그 잘나 빠진 서울대 학생증을 이용해 처음 본 여자들에게 발정 난 개처럼 치근덕거렸다는 건데... 갑자기 얼굴이 심하게 달아올랐다.
“난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칠 수 없었지.”
성호는 다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자신이 찾던 놈이 자기 눈앞에 제 발로 나타나자.
머릿속에서 뭔가 번쩍하고 좋은 생각이 바로 떠 올랐다고 했다.
그때 자신은 현영이 아버지와 함께 잔 여자와 술을 한잔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저기 술에 잔뜩 취한 멍청한 놈과 오늘 잘 수 있냐고?’
놈은 그 말을 하면서 눈빛이 야수처럼 빛났다.
나의 약점을 잡고 이야기하는 게 놈에겐 아주 유쾌한 일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난 더욱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 애가 처음에는 너랑 자는 게 싫다고 하더라고...”
“...”
“솔직히 말해. 너 서울대 나온 거 빼고 얼굴이나 키나... 여자들에게 호감을 주는 매력을 가진 건 아니잖아.”
“...”
사실이었다.
난 성호가 하는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모두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내게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밥 먹듯 했던 서성호였지만.
지금 내게 하는 말은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어떻게 아냐고?
그건 내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놈은 진실이기에 엄청난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놈의 말을 들으니 언뜻 그런 일이 생각나는 것도 같다.
당연히 성호의 이런 조롱과 모욕에 대해
나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진실 앞에선 모든 것이 무력하다.
여자에 항상 미쳐 있는 내가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는 믿기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어떡하겠냐... 널 꼭 필요로 하는 건 난데... 그래서 몸이 바짝 단 내가 그 애한테 처음에는 50만 원 준다고 했어. 그런데 싫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100만 원 준다고 했지. 그랬더니. 그때서야 콜 하더라.”
놈은 손을 들어 두 손가락으로 돈을 세는 시늉을 했다.
44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