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습니다(D-341)
커피머신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내리면서, 잠시 휴게실 벽에 붙어있는 게시물을 봤습니다.
입사일을 기념하는 내용인데 유난희 직원 한 명의 이름에 눈길이 갑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름 뒤에 ○○대리였는데, 올해는 ○○과장으로 적혀있습니다. 귓전으로 스쳐간 소문에 진급을 했다고 하더니, 맞는 모양입니다. 그럼 대리에서 과장으로 무려 9년 만의 진급이네요.
이 친구도 대리 때 맘고생을 많이 하다가, 저희 팀으로 이동한 직원입니다.
당시에 매우 못된 임원(해외법인에서는 Strongman이라고 하더라고요)이 직원들을 괴롭히는 일이 빈번하다 보니, 못 견딘 일부 직원이 노조 가입과 동시에 본사 탈출 러시가 이어지던 상황이었습니다.
원래 성격도 좋고 업무에 대한 성실함이 있는 직원이라, 저희 팀으로 이동하는데 찬성을 했습니다.
그나마 부족한 인원을 충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으니까요.
역시 이동한 후에 맡은 업무도 빠르게 습득하고, 조직에도 쉽게 융화되면서 잘 받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진급 때가 되어 면담을 해보니, 본인은 "진급할 생각이 전혀 없다"라고 합니다.
당시 대리급에서 중간관리자로 진급을 안 하겠다고 하는, 일종의 '진급거부' 현상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맡고 있는 팀원 중 한 명이 거부를 하니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2008년 세계금용위기 후 2014년에 와서 다소 경기가 회복되기는 했지만, 그 여파는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회사는 고임금자인 중간관리자(과장~부장)를 대상으로 '명예퇴직'을 강하게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직원들 사이에서는 "현재 대상자는 누구누구인데, 회사가 이런저런 방법으로 괴롭히고 있다", "다음번 대상은 누가 될 것이다", "회사에서 조기퇴직으로 제시한 조건은 이렇다고 하더라" 등과 같은 이야기가 오고 가는 침울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회사가 손 델 수 없는 영역, 즉 노조에 가입하면 일종의 보호막이 되어 걱정이 없다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만약 과장으로 진급하면 회사규정에 의해 노조에서 자동탈퇴 되므로, 진급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회사가 손 델 수 없는 노조원으로 있으면, 이런 '날 선 칼날'로부터 안전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해를 넘겨 다음 해에도, 그리고 또 해를 넘기면서 수차례 면담을 통해 설득하여 보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진급을 안 하겠다고 합니다.
이유로 내세우는 것은 "아내가 자신보다 연봉이 훨씬 많아서... 본인이 어린아이를 돌봐야 하는데, 중간관리자가 되면 일찍 퇴근하기 어려워서..."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중간관리자로 진급하면, 선배들에게 향하고 있는 '명예퇴직의 칼날'이 본인에게 향할까 봐"도 있습니다.
실장이 된 후에도 너무 아쉬운 직원이라 "이제 진급할 마지노선까지 왔는데, 정말로 진급할 생각이 없냐"라고 재차 물어봤습니다.
"시대가 변해 명예퇴직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분위기도 아니고, 워라밸이 정착된 상황이니 진급을 해도 애를 돌보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진급하면 연봉도 많이 상승하지 않냐. 그리고 동기뿐 아니라 후배도 진급을 하는데, 언제까지 대리로 있는 게 부담스럽지 않겠냐"와 같은 말로 설득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진급을 안 하겠다는 동일한 답만 돌아왔습니다.
실제로 시퍼런 칼날이 겨누어지는 대상은 중간관리자 이상입니다.
노조원으로 있는 사원 및 대리급은 해당이 안 되는 것이었지요.
확실한 보호막이 쳐지니까, 비록 연봉은 손해 보더라도 안전이 최우선인 것이지요.
그런데 진급을 했다는 것을 보니 보호막이 필요 없어졌거나, 개인의 상황이 많이 변한 모양입니다.
이 친구가 5년 이상 진급을 거부했으니, 만약 진급을 제때 했다면 어떠했을까요?
과장으로 진급하여 연봉도 많이 올랐을 것이고, 아이를 돌보는데도 큰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왜 마음을 바꾸었는지 궁금하기는 한데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모르는 척했습니다.
시대에 따라 상황은 급격하게 변하며, 우리도 이에 따라 적응하며 살아갑니다.
▶ 1997년 외환 유동성 위기 때 국가부도, 기업의 연쇄 도산으로 많은 근로자들이 직장을 잃었습니다. 이후 2000년 12월에 IMF의 모든 차관을 상환하여, IMF 위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 2008년 세계금융위기 때도 자본유출, 주가폭락, 환율급등으로 인한 타격으로 근로자들을 정리했습니다. 2014년 미국과 유럽의 경기가 조금씩 회복되면서 극복되었습니다.
▶ 현재 비상계엄 사태의 후유증으로 환율상승, 내수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있는데 언젠가는 극복할 것입니다.
저도 정년퇴직이 다가오면서, 한번 더 급변하는 주변상황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직장생활을 하면서, 겪은 많은 위기도 헤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요즘 이직을 쉽게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저도 초반에 한번 이직을 한 후 생각한 것과 많이 달라서 한동안 우울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쉽게 휘둘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좀 더 긴 호흡으로 잠시 물러나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충분하게 고민하고 본인 스스로 결정해야만, 남 탓을 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을 것이고, 나중에 후회의 골이 깊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펭귄의 짧디 짧은 다리로 달리고 달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