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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Mar 30. 2022

초록친구 (4)

장미처럼 강인한



고등학교 때 장미(가명)이란 친구가 있었다. 장미는 우리 학교에서 제일 예쁜 아이였다. 비슷비슷한 아이들 중에서도 장미는 언제나 눈에 띄었다. "장미 되게 예쁘다" 누군가가 말을 꺼내면 꼭 이런 말이 들려왔다. "장미 쟤 중학교 때 100kg 넘는 돼지였는데 살 빼고 성형해서 용 된 거다" 그러면 꼭 누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지방이식 한 거래" 나중엔 이런 말까지 붙었다. "갑자기 살 확 빼서 겉만 예쁘지 가슴은 쪼글쪼글하다더라"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장미와 같은 반이 되었다. 2학년이 되며 장미는 소위 노는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기 때문에 애들이 이제 대놓고 욕을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무시할 수는 있었다. 장미에게 호감을 갖고 말을 거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아이들의 태도는 마치 '너는 진짜 미녀가 아니다, 너는 사기를 쳐서 예뻐진 거다' 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동조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편을 들지도 않았다. 당시 내가 짝사랑하던 남자아이가 장미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달 후 나는 장미와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됐다. 장미는 가까이서 보니 더 예뻤다.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하얗고 보송보송했고 선명한 쌍꺼풀 아래 투명한 갈색 눈동자는 넋을 잃고 보게 만들었다. 바로 옆에 앉아서 만난 장미는 아이들 말처럼 못되고 싸가지 없는 아이가 아니었다. 무르고 순진했다. 라디오헤드를 좋아해서 나와 취향도 잘 맞았다. 우리는 수업 시간에 몰래 이어폰을 나누어끼고 라디오헤드를 들었다. 장미는 남자를 꼬시려고 환장한 아이도 아니었고 살 빼려고 아무것도 안 먹는 아이도 아니었다. 그냥 너무 평범한 그 나이대의 아이였다.




왜 다들 그렇게 장미를 싫어했을까?




90년대 말은 '여적여'가 당연하던 때였다. 여자의 적은 여자고, 예쁜 여자는 평범한 여자들의 적이었다. 남자들은 예쁜 여자는 꽃이라고 추켜세우고, 못생긴 여자는 호박 꽃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실제 호박 꽃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것은 미뤄두자) 예쁜 아이와 같이 사진이라도 찍으면 "얘 옆에 있으니까 완전 메주네", "같이 사진 찍히지 마라" 하는 놀림이 돌아오곤 했다. 예쁜 것과 추한 것, 장미 꽃과 호박 꽃의 세계에서 호박 꽃은 장미 꽃을 미워할 수 밖에 없었다. 여자의 적을 여자로 만드는 것은 남자였다. 


어릴 때 여자 연예인의 부고가 들리면 어른들은 "미인박명이라더니" 하고 말했다. 미인은 팔자가 더럽다는 것이다. 또 엄마는 얼굴이 예쁜 애들은 성격이 아주 세야 한다고 했다. 성격이 착하고 물러서는 찝적이고 괴롭히는 남자들을 감당할 수 없으니 안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것에 비유할 때도 또 장미가 쓰인다. "장미에 가시가 있는 이유지", "장미가 가시가 있어야 맛이지"(우웩) 



태어나니 그냥 예쁘고 본 장미가 참 별말 다 듣는다.



꽃은 아름다운 것이고, 꺾을 수 있는 것이고, 감상하는 것이고, 시드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남자가 여자에게 대입시킨 구린 역사가 있다. 꼭 대입할 수밖에 없다면 더 자세히 봐보자. 장미는 꽃이 피고, 꽃이 진다. 하지만 장미는 단 한 송이가 아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끝없이 퍼져나가는 덩굴이다. 한 송이가 지면 옆에서 다른 봉오리를 만들어 밀어올린다. 날이 춥고 바람이 세고 쪄죽거나 또는 사람들이 건드린다 해도 장미는 죽어라 새 잎을 내고 새 봉오리를 만든다. 화분에 심은 장미는 섬세히 돌봐야 하지만 길에 자라는 장미는 웬만해서는 죽지 않는다. 산에 자라는 장미의 원조 찔레도 마찬가지다. 가지를 밟아도, 부러뜨려도, 옆에서 새 가지가 또 나온다. 온 산을 뒤덮을 기세로 자라고 꽃을 밀어올린다. 


꽃은 아름답고 꺾어도 다시 자라며, 시들면 열매를 맺고 내년에 다시 꽃을 피운다. 바라보는 사람이 있건 없건 간에 꽃은 꽃의 인생을 살고 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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