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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호 Oct 03. 2024

"속지 마"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풀베기에 관한 망설임을 해결하고 싶을 뿐이었다.


『안나 카레니나』2권의 이 문장은 오랫동안 미뤄왔던 일을 드디어 해결하려고 마음먹는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한다. '해야 한다'고 알면서도 계속 미루다 머릿속 할 일 목록에 오래 남아있던 과제들을 마침내 실행에 옮기려는 그 결심의 순간을 정확히 표현했다고 느꼈다.


나도 오늘 무언가에 대한 망설임을 두 개나 해결했다. 굉장히 오래된 망설임이었고, 해결하고 나니 그것들은 기념비 두 개가 되었다.


첫 번째, 20km 달리기

몇 달 전에 마라톤에서 10km 종목을 뛰었지만 기록 측정을 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그리고 당시에 '다음번에는 20km를 뛰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까지 20km는커녕 10km도 한 번도 뛰지 않았다. 그저께도 10km를 뛰어보려고 했지만 6km 뛰니까 너무 지루하고 힘들어서 그만뒀다.


오늘은 여러 가지 이유(지인의 자극, 스트레스, 칼로리 소모, 시간 여유)로 20km를 뛰었다. 뛰면 뛸 수 있을 거라고 그동안 굉장히 안일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뛰어보니 힘들었다. 17km 지점에서 포기할 뻔했다. 그래도 끝까지 뛸 수 있었다.


머신 기록과 스마트워치 기록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목표했던 두 시간 안으로는 들어왔다. 1km 6분 안으로 뛰면 단순 계산으로 두 시간 안에는 들어올 수 있어서 그렇게 목표를 잡았다. 굉장히 오만했다. 망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뛰어보니 1km마다 계속해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특히나 17km 지점에서는 거의 정신 붕괴가 올 뻔했다.


'속지 마.'


속지 말라고 계속 자기 암시를 했다. '못하는 거 아니야. 할 수 있는 거야. 할 수 있으니까 그냥 좀 해.'

어제 클라이밍 하면서 배운 것을 바로 써먹었다. 할 수 있는데 할 수 있는 걸 모를 뿐이다. 할 수 있는데 못 한다고, 편해지라는 꾐에 속아 넘어가는 것일 뿐이다. 누군가는 포기하라고 할 동안 동시에 들리지도 않는 곳에서 할 수 있다고 응원해 주던 목소리들도 있었던 것을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럴 것 같아서 버티고 버텼다. 그랬더니 역시나 됐다.


20km 달리기에 대한 망설임을 해결했다.


두 번째, 싫은 향기 이름

20km 달리기 보상으로 선물 상자가 도착했다. 마지막 70m 남겼을 때쯤, 내 트레드밀에서 한 칸 띄운 옆 트레드밀에 어떤 여학생이 온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향수 향기를 풍기면서.


그 여자애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고 나는 완주를 한 후 헬스장 바닥에 하늘을 보고 대짜로 뻗었다. 숨을 고르고 있으니 간간히 그 향기가 내 후각상피세포들에 와닿았다. 나는 천장을 본 채로 휴대폰 노트를 열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혹시 사용하시는 향수인지? 향기 제품 이름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향기가 너무 좋아요. 운동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부탁드릴게요. 아래다가 적어주시면 감사해요."
☐        


놀래키지 않게 시야 범위에서 멀찍이 여유 있게 들어간 채로 접근했다. 그리고 핸드폰 화면을 조심스럽게 보여줬다. 메모를 읽어보더니 자기 향기를 누가 좋다고 해준 것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여자애는 머신을 멈추고 금세 보기 좋게 웃으면서 나에게 몇 마디 해줬다. 나도 고맙다고, 운동 열심히 하시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혹시 사용하시는 향수인지? 향기 제품 이름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향기가 너무 좋아요. 운동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부탁드릴게요. 아래다가 적어주시면 감사해요.
☐ 딥티크 플레르드뽀


찾았다.


지난 1년 동안 너를 찾았다. 강의실이나 캠퍼스에서 이 향기를 풍기면서 지나가는 여자들을 마주칠 때마다 붙잡고 네 이름을 물어보고 싶었다. 꽤나 인기가 있는지 흔히 마주치는 향인데, 유독 나에게는 싫게 느껴지는 이 향기에 나는 반드시 라벨링을 하고 싶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의 이름을 부를 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강의실에서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놓쳤고, 이번에는 죽는 줄 알았던 20km 완주의 성취감 덕분으로 세상만사가 사소하고 만만하게 느껴져서 쉽게 물어볼 수 있었다.


미안해. 거짓말을 했어. 사실은 향기가 좋아서 물어본 게 아니라 그 반대였어. 그래도 네가 기분이 좋아 보여서 아저씨 마음이 편했단다. 친절하게 알려줘서 고마웠다.


싫은 향기 이름 알아내기에 대한 망설임을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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