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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호 Oct 04. 2024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나름의 직장 생활 편

퐁당퐁당 연휴가 끝나고 금요일 출근을 했다. 출근이래 봤자 수업 끝나고 몇 시간 가서 '도서배가 및 서가정리'라는 업무만 하면 그만이다. 즉, 라벨링 된 책을 순서에 맞게 제자리에 넣고 책장 정리하는 일이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카톡 도서관 근무자 단톡방만 이상하게 알림이 울리지 않는다. 멘션도 소용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사무실 호출을 두 번이나 본의 아니게 무시해 버렸다. 청구도서를 미로 같은 보존서고에서 찾아오는 일을 시킬 때 호출을 하는데, 내가 늦게 가서 아마 선생님들이 하셨을 거다. 나는 그때마다 뒤늦게 가서 죄송하다고 말씀은 드렸지만 그러고 나면 마음이 당연히 편치가 않다. 


그리고 지난 수요일, 월급 정산을 위해 출근부 pdf파일을 제출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출근부 pdf 제출하기'는 유치원에서는 하지 않았던 과정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일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재밌게 놀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갑작스레 30분 시간제한이 걸린 채로 처리를 해야 했어서 혼란이 와버렸다.


담당자분께 자세한 것을 여러 번 되묻기도 하고 나중으로 미루면 안 되겠냐고 묻기도 하면서 빌런짓을 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다행히 옆에서 친구가 나서줬다. 다행히 그 애의 도움으로 잘 해결됐다.


그 후로 오늘 출근까지 아무래도 담당자님의 기분이 신경이 쓰였다. 혹시라도 나 때문에 조그마한 짜증이라도 느꼈었다면 풀고 싶었다. 그리고 안내와 공지가 없었던 것이 아닌데 마지막 기한까지 담당자를 귀찮게 만든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만회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 건데 괜히 그러는 걸까 고민을 해봤지만 나는 결국 담당자분께 드릴 간식을 사기로 했다. 도서관 1층 입구를 들어오면 바로 만나는 새로 생긴 블루팟에서 마카롱을 두 개 샀다. 출근부를 쓰러 사무실에 들어가서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간식거리를 건넸다. 


"선생님 그저께 제가 헤매는 거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죄송했습니다." 


선생님은 1초 정도는 영문도 모르는 것 같아 보였는데 "출근부 pdf 제출하는 거"라고 말하니까 바로 "아아"하셨다. 그리고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는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할까 말까 하면 그냥 하라던 말을 잘 실천한 거 같다. 담당자분이 그 일을 실제로 얼마나 신경을 쓰거나 쓰지 않았는지도 직접 확인할 수 있었고 내 찜찜한 미안함도 해소했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정산을 못 받지는 않았겠지만, 월급 못 받는 거보다는 5,600원 지출이 백번 낫기도 하고.


아. 난 일할 때 삭막한 게 싫은가 보다. 일할 때 사람들이 겉이 말랑말랑한 사람으로 보이는 게 좋다. 그들의 감정이나 인간성을 느끼고 싶은가 보다. 딱딱한 기계처럼 있거나 감정 표현이 없는 피상적인 관계일 때 나는 그걸 조금 힘들어한다는 걸 느끼고 있다. 어릴 때 몸 쓰는 일을 할 때는 그런 불편함을 못 느꼈는데 아마 육체노동을 할 때는 모종의 유대감을 느끼기가 더 쉬워서 그랬던 것 같다.


도서관 근무가 한 달이 지났다.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 글을 쓸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다음 학기에는 아마 또 다른 근무지로 갈 것 같다. 왜냐면 이제 청구기호를 읽을 줄 알고, 책 찾는 시스템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스무 살의 나에겐 낯설었던 그 '도서관'이라는 세계가 품었던 비밀을 밝혀낸 셈이다. 그럼 됐다. 다음엔 또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또 다른 하나의 미지를 타파할 것이다. 재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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