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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by 온호

오늘 오후에 우체국 5호 박스 4개 정도의 짐을 쌌다. 2월 18일 화요일 오전 10시 반에 이삿짐을 옮겨줄 용달 차량이 오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미리 쌀 수 있는 짐은 미리 싸두는 게 여유가 있을 것 같았다. 내일까지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들과 빨래거리, 입을 옷은 남겨두고 나머지는 어느 정도 집어넣었다.


나는 인생에서 이사를 겨우 세 번밖에 겪지 않았다. 나이에 비해 분명히 적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겪은 첫 이사는 내가 느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습관처럼 예전 집으로 하교하던 나를 보시고 귀엽다는 듯 웃으시던 와플 아주머니의 얼굴이나, 새로 지은 집이 넓어서 신났던 느낌과 현관문과 창고문이 헷갈리게 생긴 구조라서 처음에는 자꾸 창고문으로 나가려고 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 정도를 기억한다는 의미가 있다. 같은 목사에게 사기를 당해 계획과 다른 곳으로 이사하게 된 젊은 목사와 그의 아내, 여섯 아이와 시어머니의 이삿짐을 홀로 정리했던 여인의 고통에 대해 전해들은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다.


두 번째 이사는 아버지가 목회 은퇴를 하시면서 태어나 평생을 산 동네를 떠나 김천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이 때는 느낄 것이 너무 많아서 힘들었다. 현실에서 도망쳐서 컴퓨터 게임으로 눈 가리고 심각한 아웅을 10년 가까이했던 시점이었다. 아홉 식구의 인생을 버리고 남기고 정리하는 것, 그제야 무섭게 밀려오는 내 죄를 마주 보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때의 이사를 계기로 내 인생에 변화가 찾아왔는데 어쩌면 고통이 인생에게 필요한 것 전부 같기도 하다.


고등학교 3년의 기숙 생활이나 이번 1년 반 동안의 대학 기숙 생활을 이사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 기숙사에서 거리는 멀지 않은, 원룸 중 가장 다는 4.5평의 원룸에서 자취를 시작하러 떠나는 것이 내 인생의 세 번째 이사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에 혼자 이사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처음 경험해 보는 일들이 겁나기도 했고 감정적으로 '와~ 이사 간다, 자취한다.' 하는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 미숙한 것들과 약한 모습들을 많이 보게 돼서 힘들었다. 그중에서 하나를 예로 들면, 나한테 LH청년전세임대주택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유치원 친구 A는 SH청년매입임대주택으로 신청해서 나보다 조금 저렴하면서도 방 크기가 두 배인 옆 건물에 살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됐을 때의 내 감정이라든지가 있다. 제도에 대해 더 잘 알아볼 생각과 노력은 하지 않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일을 진행했던 나의 모습과, 집을 잘 구해놓고도 더 좋은 조건에 대한 욕심이 생기는 간사한 마음에 대하여 생각했었다.


오늘 기숙사 방에서 짐을 싸면서도 여러 복잡하고 어두운 생각이 들려고 무드를 잡았다. 스웨터에서 도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붙어있는 게 가능했는지 모르겠는 추억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잡화를 담아놓은 에코백, 책장의 비스듬한 교과서, 비누와 칫솔 세트, 영수증에서도 1년 넘는 세월의 이야기와 기억들의 냄새가 비에 젖은 흙 냄새 피어오르듯 풍겨왔다. 짐 싸기 직전에 니체의 책을 읽으면서 쓴소리를 들어놓지 않았더라면 아마 쉽게 감정을 떨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책 내용 덕분에 감상에 빠지려는 나를 일찌감치 만류할 수 있었다. '강해져야지.' 강한 사람을, 강해지려는 사람을 동경하지만 말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그렇게 살도록 미뤄둔 노력을 해야 할 때다.


하여간 이사라는 사건은 인생에 꽤 도움이 되는 편 같다. 여러가지로 정리도 하게 해주고 내면을 성장하게 해주는 계기가 분명 되는 것 같다. 비교 대상들이 생기고 나니, 기숙사는 방이 참 깨끗하고 채광이 정말 좋은 편이었다. 지하엔 헬스장과 탁구대가 있고 층마다는 조금씩 다르게 생긴 휴게실, 10층에는 포켓볼. 1층 홀에서는 프린트도 할 수 있고 좋았는데 이제 그것들을 잃고 나니 얼마나 아까운지가 느껴진다. 그래도 안녕, 잘 가. 다 좋은데 랜덤 룸메랑 사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어. 그 힘듦이 나에게 오히려 좋은 영향을 끼치는 부분도 있었지만 이젠 혼자 살아보는 것도 해보련다. 어려움 속으로 힘듦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더 이상 피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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