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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2 - hotbread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by 온호

핫브레드. 설 연휴 끝나고 올라오니 생겨 있던 회기역 핫브레드. 상경 당일에는 마음이 복잡해서 못 보고 못 맡고 지나쳤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계단부터 풀풀 풍기는 빵냄새를 못 맡고 지나쳤었는지 모르겠다. 빵도 좋아하고 후각도 예민한 나에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정신이라는 건 정말 육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반대도 마찬가지일 테고.


서울 올라온 다음날 지하철 탈 일이 있어 역에 갔다가 그제야 핫브레드가 들어와 있는 걸 보게 됐다. 계산하면서 점원분께 언제 열었냐고 여쭤보니 이틀 전이라고 알려주셨다.


핫브레드는 내가 재작년에 방에서 비상 사출하고 얼마 안돼 서울시 연계 상담을 받으러 다니던 성신여대역에서 처음 보게 됐다. 그때 만쥬나 다른 빵냄새보다 냄새도 맘에 들었고 마침 사람들이 몇 줄을 서있길래 어떤가 궁금해서 먹어봤다. 상담 아홉 번 다니는 동안 종류별로 먹어본 결과 꽝도 있었지만 굉장히 맘에 드는 종류도 있었다. 그 후로 핫브레드가 있는 역에 대한 내적친밀도가 올라가는 경험을 했고, 마주칠 때마다 어지간하면 못 참았다. 그러다가 기대도 안 했던 회기역에 생겼을 때는 신기하고 반가우면서도 착잡했다. 빵은 내 몸에서 부작용 없이 안전하게 받지 못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사 가는 방이 학교에서 회기역 1번 출구로 들어갔다가 2번 출구로 나오면 얼마 못 가 있다. 그러니까 방앗간이 등하굣길 한가운데 생겨버린 것이다. 짹짹. 빵냄새 유혹 참기, 1차원적 욕구 조절하기 훈련이라고 생각해야겠다.


오늘 도서관 근로 마치고 기숙사에 와서는 상자에 담아 옮기기 마뜩잖은 짐들을 큰 타폴린 백에 싸들고 옮겼다. 가서 환기도 한 번 시켜놓을 겸. 냄새도 냄샌데 청소도 내일 시간을 많이 써야 할 것 같다. 재밌게 해 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학교 안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다. 내일부터는 학교 밖으로 나가서 사는구나. 새삼 큰 변화다. 이런 복잡미묘한 감정 속에서 기숙사 세탁기 앱에 충천해 놓은 캐시가 오늘의 마지막 빨래를 끝으로 200원 남은 것이 상쾌함 한 방울이 되어 줘서 기분 좋다.


먼저 와있던 첫 룸메와 어색한 인사를 하고서 지금 앉아 있는 베이지색 큰 일체형 책상에 짐을 풀던 때가 생각난다. 10년 만에 집 밖으로 나와 졸업이라도 해보자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살아보자며. 그렇게 마음 먹었지만 막상 세상으로, 사람들 속으로 나오니 무서워 죽을 것 같이 떨었었다. 그런 날들에 못 견뎌 어느 한 새벽에 노트북으로 토해내듯 글을 썼던 책상.


좋다. 죽도록 불만족스럽고 후회스럽고 괴롭기도 한 최근의 일들도 결국은 내 삶의 변화가 가져온 고통이었구나. 살기로 했기 때문에 맛본 고통. 이렇게 보니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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