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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by 온호

"잠깐! 말하지 마."


내가 아직 오렌지 레몬을 입에 넣기 전, 먼저 반쪽을 나눠 받아 이미 우물우물 씹고 있는 미묘한 표정의 청년의 입에서 맛에 대한 평가가 나올까봐 내가 다급하게 말했다. 내가 온전하게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나서 내 손에 남아있는 나머지 반쪽, 고작 세 개의 알이 붙어 있을 뿐인 하찮을 만큼 앙증맞은 주황색 덩어리를 입에 집어넣었다.


"맛이 안 나네."


그렇다. 맛이 나지 않았다. 용케 이런 걸 맛보고도 아무 소리를 안 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조그만 화분에서 자란 관상용이라고 보는 게 맞을 오렌지 레몬의 열매는 물 맛이었지만 향만큼은 황홀했기 때문에 그렇게 실망스럽진 않았다. '더 뒀어야 했나'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반드시 먹을 것이라 했던 오렌지 레몬 열매. '반드시'라고 다짐했던 건 내 손에서 11개월을 자란 나무의 열매를 내가 아까워서 먹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품을 들였더라도 내 노력이 담긴 결실을 내 손으로 취해 흡수하자는 의미를 담아서 반드시 먹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마음이 무너져 죽고 싶어 하던 청년이 내 원룸에 들리게 되었고, 온 김에 내가 1년 동안 키운 나무의 소중한 첫 열매 줄 테니까 먹고 죽을 생각은 그만하라고 생색내며 함께 나눠먹게 되었다. 괜찮은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니체는 동정만한 악이 없다는데 난 니체만한 위인이 아니어서 모르겠고, 이 일을 얘기하지 않는 게 더 나은 처사일 텐데 난 또 떠벌인다. 난 천민의 자질을 타고났나 보다.


하지만 나는 또 완전 천민의 자질만 있는 것도 아닌 것이 내 힘듦을 오롯이 내가 감당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강해지고 싶으니까. 반대로 청년은 어쩌면 나에게 조금은 의존 중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 청년에게 "알아서 해결해야 해요."라고만 말할 수도 없다. 시점에 따라서 반드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때도 있고 자신의 힘을 키울 필요가 있는 때가 있다는 걸 아니까. 그리고 이 청년은 도움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그래서 만약 지인이 고립은둔청년이고 본인의 의지 문제에 도달하기 전,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단계라면 손이 아닌 말은 아무리 내밀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개인의 의지박약이 물론 원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만이 원인이 아니기도 하고 순서는 분명히 있는 것 같다. 다만 손을 내밀고 함께 걸어주는 데에는 조력자의 엄청난 사랑, 지혜, 물질도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잘 없어서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못하는 것 같다. 손바닥보다 혓바닥으로 때우는 일이 언제나 쉽다.


내 오렌지 레몬이 언젠가 그늘이 생길 만큼 큰 나무가 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이렇게 중심 없고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언젠가는 뿌리가 멀리 뻗은 큰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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