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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의 냄새

2025.04.21

by 온호

열정의 냄새

점심을 먹고 헐떡고개를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옆에 있던 여학생 무리 중 한 명이 "열정의 냄새가 엄청 나는 거야."라는 말을 했다. 뒤이어 "강의실에 딱 들어가니까 남자애들 냄새가 나더라구."하며 덧붙였다. 땀냄새를 '열정의 냄새'라고 욕도 쓰지 않고 예쁘게 말하던 목소리의 주인은 어떤 마음씨를 지녔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내일부터 시험 기간이다. 3월 3일이 공휴일이었어서 시험기간도 월요일 시작이 아니라 화요일 시작인 듯하다. 시험 기간이 되면 아무래도 학생들은 바빠진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동안에도 시험기간쯤 되면 덜 씻고 덜 꾸미고 다니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걸 크게 실감할 수 있었다. 로비를 지나다니면 머리 냄새가 나는 경우가 많아지고, 모자를 썼거나 잠옷 같은 편안한 추리닝 차림의 학생들이 확연히 늘기 때문이다.


월요일, 수요일 아침 9시에 수강하는 [고전읽기-플라톤]에서 내 옆자리에 앉는 남학생도 열정의 냄새를 풍긴다. 숨을 헐떡이며 늘 9시에 딱 맞춰 도착하는 걸 보면 시간을 맞추기 위해 뛰어오는 것 같다. 이성적 사고보다는 감정적 평가가 선행한다는 걸 배웠기 때문에 옆에 앉은 학생에 대한 불쾌감이 들었던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대신 '오늘도 뛰어오느라 땀이 났구나.', '지각하지 않으려고 뛰어오는 게 성실한 성격인가 보네.'하는 생각들을 했다. 다음부터는 헐떡고개의 여학생처럼 '열정의 냄새가 나네.'하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한테서도 다른 의미의 열정의 냄새가 좀 났으면 싶다.



이웃

며칠 전부터 엘리베이터와 비상구 사이 공간에 원룸에 옵션으로 있는 책상이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이틀 정도 뒤부터는 책상 위에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책상 주인분은 안 보이는 공간으로 치워주세요."

까만 볼펜으로 적힌 그 말을 읽으면서 왠지 내가 의심받을 것 같다는 걱정을 했다. 내가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후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그러면서도 걱정하는 일의 대부분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며 또 괜한 예기불안을 겪는 나를 달랬다.


어젯밤이었다. 조용한 방에 예상치 못한 벨소리가 시끄럽게 가슴을 놀래켰다. 회색 현관문을 바라보며 그 너머의 이유 모를 방문객이 누구일지 상상하니 무서웠지만 "네~"하고 밝게 대답했다. 내 방 초인종을 누를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문을 여니 옆집 2호 남자가 혹시 책상이 내 것이냐고 물어봤다. '아. 이게 진짜로?' 이때를 떠올리며 상상했던 대로 행동했다. 책상을 가리키며 "제 거는 저기 있어요."라고 불쾌한 티 없이 공손하게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아, 죄송합니다." 하고는 내 방 현관문을 닫아주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예기불안도 장점이 있다더니 그 경우를 아주 사소하게 경험을 한 것이 재밌었다.


옆집 남자는 매일 새벽 5시 50분쯤에 씻는다. 맞닿아 있는 화장실을 통해 물소리가 잘 들려서 안다. 창밖 도로변 쪽에서 차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던 날은 휴대폰 알람소리까지 들렸던 적이 있으니 방음이 굉장히 안 좋긴 하다. 오늘 아침에는 그 물소리가 사라지고 6시 10분쯤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복도에서 책상 끄는 소리가 시끄럽게 났었다. '직접 옮기나 보네.'


학교 갈 준비를 마치고 7시 40분쯤 복도로 나와보니 책상이 4호 앞으로 옮겨져 있었다. 1호나 4호에 초인종 소리가 나는 건 못 들었었는데 확인을 어떻게 한 건지 궁금했다. 눌렀는데 내가 못 들은 건지, 내가 딴 데 있을 때 1호나 4호를 확인한 것인지.


이사 온 지 두 달이 되었지만 2호 남자 말고는 1호나 4호에 누가 사는지, 누가 살긴 하는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유독 자주 마주치는 5층의 특징적인 여성 말고는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 본 이웃 자체도 거의 없다. 주차장에 담배를 피우러 내려온 사람들을 가끔 마주치거나 하는 것이 다다.


평범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배달을 시키지 않았는데 집 초인종이 눌리면 겁을 먹는, 단절된 현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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