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사랑하는 벗의 지시로 본가에서 내 어린 시절 필름 사진들을 찍어 디지털로 옮겼다. 사진 찍는 것 그 자체와, 아마 잊혀진 과거와 잊혀진 자신의 모습, 그리고 잊혀진 삶의 순간을 미래로 전해주는 사진의 힘을 좋아했던 것 같은 아버지는 6남매의 어린 시절을 면밀히 지켜보며 수많은 사진을 남겨 두었다. 이사 전에는 그것이 다락방에 있는 서랍들과 박스들에 무차별적으로 섞여 있었는데 최근 아버지는 그 사진들을 개인별로 분류하는 작업을 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덕분에 나는 내 사진만 모여있는 종이 가방에서 사진을 꺼내 손쉽게 핸드폰으로 옮겨 담을 수 있었다.
내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서 '나는 원래부터 이렇지 않았구나.', '나는 이런 아이였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원래부터 이랬구나.' 하는 부분도 있었다. 산 중턱에 있는 체육시설 옆 비탈 위 무섭고 긴 그네를 타면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어린 내 모습을 보니 그랬다. 5촌 조카들, 3촌 조카들을 여럿 봤고 유치원에서 근무도 해봤지만 겁이 저 정도로 없는 아이는 드물다. 내가 익스트림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자극에 무뎌져서 더 큰 자극이 있어야만 도파민이 나오는 불감증자여서 그런 것도 아니었고, 남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우월감을 느끼는 나르시시스트이기 때문도 아녔다는 걸 알게 됐다. 난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사춘기가 찾아온 초등학교 고학년부터의 내 모습은 다른 아이 같았다. 순둥이 같은 모습은 사라지고 표정과 자세에 겉멋이 들어갔다.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부조리에 대한 환멸과 분노, 기성세대의 불합리한 억압에 대한 반항기가 가득했다. 불량한 냄새가 폴폴 났다.
요즘 찍은 사진들 속 내 모습은 어떤가 하면, 다시 사춘기 이전 어릴 적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다. 분노하는 것을 접기로 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세상은 언제나 선과 악이 혼재해 왔고 선의 편에 서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악의 편에 서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순순히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는 걸 알게 된 것이 도움이 되었다.
내 어린 시절 사진을 찍어 오라는 지시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또 한 번 친구의 도움을 받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