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
요즘 글을 전 같이 자주 쓰지는 않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다이어리를 쓰다 보니까 기존에 회고 기능을 하고 있던 글쓰기가 조금 뒤로 밀려나서 그런 것 같다. 글이 뜸해도 인생이 뜸할 수는 없어서 언제나처럼 '하고 싶은 것들,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아주 천천히 하나씩 하면서 살고 있다.
지난주 화요일쯤, 밤에 자려고 누웠더니 이마에 물이 튀는 것이었다. 에어컨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당혹스러웠지만 일단 리모컨으로 에어컨부터 얼른 껐다. 에어컨을 틀어놓고 책상에 앉아있었던 시간 동안에 이미 그 상태로 지속이 됐는지 매트리스 상단부가 흥건했다. 쾌적한 이부자리가 축축해진 것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취해야 할 조치들부터 취했다. 그리고 기분이 상한 것보다 더 큰 감정이 있었는데, 그건 두려움이었다. 냉기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밤이야 그냥 버티고 잔다 해도 당장에 다음 날 아침부터 더울 걸 생각하면 겁이 났다.
다음 날 아침, 에어컨을 다시 틀어봤더니 작동이 멀쩡히 되길래 누수가 일시적인 현상인 줄 알았다. 30분 정도 지나니 또 물이 떨어졌다. 출근하느라 일단 해결을 미뤘다. 퇴근 후에는 일과 종료 시간에 건물 관리하시는 분께 연락하기가 미안해서 하루 넘겼다.
일과 시간에는 시원한 역무실에 있느라 까먹고 연락을 안 했다가 목요일 퇴근 후가 돼서야 틀 수 없는 에어컨을 망연자실 쳐다봤다. 어쩔 수 없이 연락을 했다. "낼 갈게요." 짧은 답장이 왔다.
금요일 퇴근 후에 방으로 돌아오니 별 다른 흔적도 없고 메시지도 없어서 안 왔다 가신 것 같았다. "에어컨 틀어도 괜찮을까요." 물어봤다. "오늘 못 갔어요."
토요일에는 에어컨 안 틀고 살던 시절을 생각하며 지냈다. 점심때 어딜 몇 시간 다녀와야 됐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 환승역에서 장을 9만 원 치 봤었다.
일요일에는 다른 일정이 없었다. 누나가 가족 단톡방에 공유한 소식을 보다가 T멤버십 할인 이벤트가 있길래 던킨 도너츠에서 피서를 하자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방을 떠나 세상 살이하면서 연애하고, 돈 아끼고 할 일이 없었다 보니 카드사, 통신사 할인 혜택 받을 줄도 몰랐다. 23살 때쯤 친구가 "너도 연애하고 그러면 이런 것도 배우고 그럴 텐데."라는 말을 했었다. 그 당시에 이미 1년 반 이상 내가 두문불출했던 것, 그리고 초중고를 같이 다녔기 때문에 말 안 해도 내가 왜 그렇게 됐는지 어느 정도 이해하는 녀석이어서 했던 말인 것 같다.
10년이 더 흘러 어디 가서 뭘 잘 사 먹게 된 후로도 저런 걸 잘하지 않았다. 늘 마음속에서 '나보다 형편 좋은 사람들이 혜택을 더 꼼꼼히 잘 챙기는데 나는 절실하지 않아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있었다. '할 줄 알아야 되는데, 할 줄 알아야 되는데.' 몇 년 동안 이렇게 생각만 하다 처음으로 적극적인 시도를 했다. 폭염이 나를 부추겨준 셈이다. 역시 햇볕정책
매장 안에서 커피랑 도넛을 섭취하면서 정말 피서를 했다. 행사 매장을 확인해보지 않은 탓에 헛걸음 스택이 쌓였었고 그래서 제대로 도착해서 마셨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생명수 같았다.
두 시간 정도 있으니 심심해졌고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경종왕릉을 구경하러 갔다. 한국사 공부를 하고 있다 보니 이것저것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생겼고 경종왕릉도 그중 하나였다. 때마침 생각이 잘 나기도 했고 던킨에서도 가까워서 잘됐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청년분들과 자조모임으로 태릉에도 갔던 적이 있는데 그때랑 상당히 다른 느낌이었다. "숙경영"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나, 앞뒤 흐름이 어땠는지 같은 걸 알게 돼서 그런 것 같다. 공부 전후로 그렇게 다르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재밌었다.
서울 시내 캠퍼스 투어도 진행 중인 상태기 때문에 왕릉을 돌아본 후 한예종도 들렀다. 보통의 경우 대학은 한 군데만 다니기 때문에, 대학을 다니더라도 또 다니는 구역만 다니기 때문에 일부러 구경하지 않는 한 여러 캠퍼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일이 없다. '내가 다른 학교에 입학했더라면 그 평행세계에서는 여기서 4년을 머물렀겠지.' 같은 생각으로, 여러 삶을 하나의 삶에 담는 욕심 또는 호기심에서 나는 캠퍼스 구경이 하고 싶은 것이다.
캠퍼스 안 따릉이 대여소에서 따릉이를 빌려서 집까지 재밌게 타고 왔다. 반납을 하고 반납이 잘 됐는지 핸드폰으로 확인하려는데 핸드폰이 없었다. '아 너무 쌩쌩 달렸나?' 동선을 거슬러 돌아가며 확인하기에는 중간중간 도로도 섞여 있었다. 도로에 떨어진 내 핸드폰을 자동차가 밟고 지나가는 장면이 재생됐다. 반바지 주머니에 넣으면 종종 핸드폰이 튀어 나간다는 걸 알면서도 또 그랬다는 생각에 자책을 조금 하기도 했다.
일단 방에 들어갔다. 노트북을 켜고 가족 단톡방에다 전화 좀 걸어달라 했다. 받지 않는 걸 보니 누가 주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박살이 났을 수도 있겠다.
근데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고 핸드폰도 잃어버려본 놈이 찾는 걸까.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몇 번 잃어버리고 찾아본 경험이 생겼다 보니 곧바로 내 디바이스 찾기가 생각났다. 어쩌면 얼마 전 역무실로 와서 자기 핸드폰이 선로에 떨어져 있다고 지도에 표시된 기기 위치를 보여주던 아주머니 덕분일지 모르겠다.
한예종 캠퍼스에 내 핸드폰 위치가 찍혔다. 누가 주워서 맡겨놨거나 어디 내리막길이나 과속방지턱 같은 데서 떨어진 것 같았다. 곧장 찾으러 갔다. 따릉이를 타고 갈랬더니 핸드폰이 없으니 빌릴 수가 없었다. 버스를 타자니 뭘 타야 될지 검색도 못해서 새 러닝화도 있겠다 그냥 뛰어서 갔다.
핸드폰 위치 검색했던 화면을 그대로 남겨놓은 노트북을 그대로 가방에 넣어 가져 온 것이 무색하게 따릉이 빌리는 곳에 도착하니 생각이 났다. 따릉이를 꺼내면서 핸드폰을 옆 따릉이 안장에 올려놓은 것이.
멍청비를 체력으로 지불하는 것에 익숙한 내 삶을 자조하면서도, 핸드폰이 자동차에 깔리지 않은 것, 누가 가져가서 패턴을 풀지 않은 것, 비가 많이 안 온 것 등에 너무너무 감사했다. 안 그래도 중랑천 달리기를 하려고 했었는데 따로 안 해도 되게 돼서 감사했다.
주말이 다 지나고 월요일 아침이 됐을 때 건물 관리하시는 분께 다시 에어컨 얘기를 드렸다. "오늘 못 갔어요." 뒤에 아무 말도 없길래 "가능하실 때 와주세요."라고 말했지만 그러면 진행이 안 될 것 같았다. 물 새는 건 온도차나, 배수관 막힘 때문에 그렇다는 건 검색해 봤지만 내가 열어 봐도 해결을 할 수 없었다. 관리하시는 분도 본인이 확인해 보고는 수리 기사를 불렀다고 한다. 8만 원이 나왔다. 계좌 이체를 했다.
관리하시는 분이 "이체를 일단 하시고 집주인한테 말씀을 드리라."길래 그렇게 하고 영수증 사진을 집주인에게 보냈다. 그러자 5초 만에 전화가 와서 "누수는 먼지로 배수관이 막혀서 그런 것이고, 세입자 관리소홀이기 때문에 비용 부담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필터 청소를 안 해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안된다고 하면 그냥 조용히 내가 내고 말랬더니 "너가 관리를 똑바로 안 해서 그래. 누구 책임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으니 네가 내."라는 식으로 말을 해서 그만 조목조목 따지고 말았다. 내가 임차인으로서 에어컨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만한 사진이 운 좋게 남아있었다. 시원하게 에어컨 틀 생각에 신이 나서 필터 청소를 하던 사진을 찍어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집주인 본인도 알고 부동산에서도 알만큼 전 세입자가 더럽게 살아서 문제가 됐던 방을 청소도 하지 않고 넘겼고, 사용 두 달 만에 멀쩡한 에어컨 배수관이 막힐 정도로 관리 소홀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갈등회피 성향이라 8만 원 내고 집주인과 불편한 커뮤니케이션을 피할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억울한 게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라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내 잘못이라니까 그걸 잠자코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돈 8만 원 때문에 붙잡고 따지는 게 왠지 처량해 싫기도 했지만, 돈을 우습게 여기면 돈도 나를 우습게 여긴다는 말을 생각하며 성향을 거슬러 야무지게 할 말을 했다. 마음이 좀 힘든 과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집주인이 돈을 냈다. 그래도 공손하고 논리적으로 말을 하니 집주인 분도 말이 통하는 분이라 감사하다.
왜인지 엄마가 큰 누나 반지하 자취방 벽지 곰팡이 때문에 열을 올리던 15년 전이 생각나 마음이 복잡했다. 그렇게 쪽팔려할 일이 아니었는데.
그리고 어느 정도 벌만큼 잘 벌어서 이런 사소한 진절머리로부터 벗어나도록 애써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멤버십 할인 활용, 경종왕릉 견학, 한예종 캠퍼스 구경같이 머릿속에 길고 짧게 들어있던 것들을 해소한 것 이외 또 하나 해소한 것이 있다. 레몬청을 담글 때 껍질까지 썰어서 과육만 가지고 청을 담가보는 것이었다.
작년에 같이 청을 만들었던 여자가 자신은 "혼자 만들면 껍질까지 전부 처리해서 만드는데 이렇게 담그는 건 성에 안 차지만." 하며 은근슬쩍 젠체 했던 적이 있다. 그때부터 나도 그렇게 한 번 만들어보고 싶었다. 맛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라고, 너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장을 9만 원 치 봤던 날 레몬도 샀다. 인터넷으로 살 때와 다르게 직접 보면서 상태가 좋은 걸 고를 수 있다는 게 새삼 좋았다. 집에 도착해서 3단 세척 과정을 거친 레몬을 예쁘게 썰었다. 껍질도 썰어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레몬청을 오늘 처음 먹어봤다. 얼음컵과 플레인 탄산수를 사서 청을 듬뿍 넣었다. 시간이 좀 더 많이 들고 번거롭긴 했지만 확실히 쓴맛이 없고 깔끔했다.
시원 달콤한 레모네이드를 마시니 이것도 피서는 피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