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문 밖으로 내보내진 몸뚱이 위로 공기의 무거운 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날이 언제만인지, 그게 이렇게나 사람을 산뜻하고 기쁘게 만들 수 있는 일인지 오늘 아침에는 새삼 놀랐다.
어떤 아저씨가 15분 재승차가 안 되는 역에서 하차를 찍고 나왔다. 실수였다. 개집표기를 빠져나오자마자 자신의 착각을 알아차린 아저씨는 그렇게 어이없게 1,550 원을 손해 보는 것이 싫었다. 강화 플라스틱 칸막이가 아주 잠깐만 다시 열려주면 실수는 없던 일이 될 수 있는 사소한 문제였다. 그래서 역무실을 찾아 방금 막 게이트를 실수로 지났다고 호소했다. 역무원의 반응이 본인이 기대했던 것과 달라서 실망을 한 것인지 당황을 한 것인지 아저씨는 침착함을 잃고 화를 내는 것에 가까운 흥분 상태로 따졌다.
짧은 말을, 같은 말을 반복했다. 상대의 말은 듣지 않고 상대의 입장은 무시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아닌 말은 1초도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는 것마냥 방금 전에 했던 말과 똑같은 말로 상대의 말을 끊었다. 그 말투와 눈빛이 어디서 봤던 것과 완전히 똑같아서 신기하고 재밌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캐릭터는 그렇게나 클론처럼 똑같은 것일까. 세상을 향한 어떤 적개심 같은 것이 사람을 조종하면 모두 그런 말투가 되고 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어제 75회 한능검을 봤다. 근무지에서 할 공부로 한국사를 골랐고 마침 3분기 시험이, 가까운 시기였던 한 달 후에 있어서 타이밍도 적절해서 좋았다.
자국의 역사라는 것은, 상식의 범위에 대한 논란에서 벗어나서 상식이라고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근데 그런 상식이 없으니 역사에 관한 단어를 볼 때마다 늘 다시 공부해보고 싶었다. 국사가 서울대 가는 녀석들에게만 필수이던 시절의 끝무렵에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수업시간에 들었던 근현대사에 관한 단어 몇 가지들만 꿈속 기억처럼 흐릿하게 남아있는 상태였다.
15년 가까이나 됐기 때문인지, 그때는 공부라는 것을 대하는 마음가짐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애초에 공부를 했던 적이 없는 것인지, 문제집 내용은 처음 보는 것과 다를 게 없이 느껴졌다. 그래도 궁금해서 하는 공부는 꽤 재밌었다.
컴활 합격률이 10% 안팎인 것과 한능검 합격률이 40~50%인 것이 보여주는 그대로 한능검 시험은 컴활에 비해 상당히 수월했다. 컴활을 공부할 때처럼 구토감이나 우울감, 효능감 저하도 경험하지 않았다. 컴활은 실기 시험을 통해 기술에 대한 자신의 완전한 이해를 직접 구현해 내는 능력까지 발휘를 해야 하고, 객관식 시험인 한능검은 맞는 것 하나만 찾거나, 모르는 것들을 빼거나, 눈치 좋게 그럴듯한 걸 찍거나 하는 식으로 완전한 이해 없이도 어물쩍 넘어갈 수 있는 것 같다.
많은 수험생들이 가산점을 위한 자격증 하나 얻는 것이 목표여서 그런지 80점만 넘긴다는 계획으로 시험을 준비하는 것 같다. 그래서 2주컷, 3주컷 같은 제목이 공부 영상에 자주 보이고 흐름보다는 키워드 암기 위주의 공부를 많이들 한다. 다들 그런 공부에 회의를 못 느끼는 것도 아니지만 "시험칠 때만 잠깐 외우고 까먹는 거죠." 같은 말로 공감하고 뭉쳐서 서로를 지킨다. 여동생도 나에게 "의미 없는 거 같은데 다 그냥 그렇게 하는 거라."라고 한 적이 있었다. 육성으로 출력되는 그 말을 귀로 듣던 순간에도, 80점만 넘긴다는 디지털 세계의 말들을 눈으로 읽을 때도, 내 안에는 사라지지 않는 거부감이 고집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어떤 방식으로든 외부 세계에 표현하고 나 스스로에게도 증명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사람이 늙으면 남이 들어봤자 하등 쓸모없는 자기 자식 자랑 늘어놓기를 좋아하게 된다든지, 피해의식이 생길 수도 있다든지, 자기는 고집불통으로 늙어버린 노인이 아님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이상으로 스스로를 깎아내린다든지.
젊어서 혈기가 넘칠 땐 노인들이 하는 말의 진가는 저평가하고 자기의 새로울 것 없는 새로운 답을 맹신한다든지.
마음이 아직 단단해지지 못한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쉽게 떠벌인다든지.
소설을 읽으면 그 안에 세상 모든 인간이 들어있다. '읽으면 안 저럴 텐데.' 하는 행동을 하는 사촌 동생을 보다가 했던 생각이다.
소설에 들어가 있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볼 수 없는 내 어리석음은 뭘까.
방심하지 않을 때는 방심할 수 없다. 방심은 방심했을 때만 할 수 있다. 그럼 방심하고 있을 때 방심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가능한 방법은 뭐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요즘 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