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2
<트리거 경고: 자살 관련 내용 포함>
친구에게 내가 다니는 학교 도서관 내부를 구경시켜 줄 기회가 있던 날이었다. 친구가 구경을 시작할 때, 나는 인기도서 서가에서 한강 작품이 자리하고 있는 부분으로 곧장 가서 그 책이 있나 확인해 봤다. 있었다.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는 도서관에 비치된 책이 네 권인데도 그 전부가 언제나 대출 중이었다. 작년 10월 10일 노벨상을 수상한 후로 일을 하다가 한 번씩 서가에 가서 '있나?'하고 봤는데, 그때마다 있었던 적이 없다. 그래서 처음으로 서가에 그 책이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서있는 걸 발견했을 때, 흔치 않은 기회라는 걸 알고서 얼른 집어 들었다. 친구가 도서관 행사에 따라와 준 것이 내가 서가를 확인한 계기가 된 셈이라, 친구에게 고마웠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여러 영혜들이 떠올랐다. 담배를 피우는 게 걸려서 부모님과 싸우고 목을 맸던 꽃집 아들놈 친구. 그 녀석은 나랑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같이 다녔는데 내가 진짜로 웃기다고 생각해 본 몇 안 되는 놈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머리가 아주 좋고, 드물게 문이과 감성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었으며, 자동차 분야를 좋아했던 고등학교 동창도 있다. 체육수업 후 화장실에서 종아리부터 아래 허벅지까지를 비누로 씻어내면서 나온 갈색 흙탕물이 하얀 세면대로 흘러내리자 "이것 봐, 생각보다 위에까지 많이 더러워진다니까?" 하던 순간이 특히 기억에 남아있다. 수많은 남고생들 중, 그 녀석처럼 체육이 끝나고 비누로 다리를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녀석은 없었다. 약간 말을 빠르게 하고 톤이 언제나 높았는데, 신나서 말을 많이 하다 상대방의 지겨워하는 얼굴에 시무룩한 표정이 되는 것이 어쩐지 내 눈에 자주 띄곤 했던 것 같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느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그 녀석이 스스로 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내가 영혜였던 적도 있다. 학생 주임 선생님이 "머리가 짧은 것이 학생다운 것."이라며 내 머리카락을 서걱 잘라버렸다. 입을 벌리고 탕수육을 처넣는 것과 비슷하다. 난 어릴 때부터 머리를 기르고 싶어 했는데 가족들도 "남자가 무슨 머리를 기르냐."라고 하곤 했었다.
머리가 짧은 것을 학생다움과 남자다움과 연결 짓는 어른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것들에 어떤 성질이 서로 연관이 있다는 건지 이유를 아무리 들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지금 기준으로 130년 전까지만 해도 오히려 머리가 긴 것이 '정상'이었다. 머리를 기른다는 것의 실재는 변하지 않지만 거기에 따라오는 의식은 변한다. 같은 것을 두고도 그렇게 변할 수 있는 의미가 진짜 가치 있는 것인지 공감할 수 없다.
머리를 기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젖가슴으론 아무도 죽일 수 없는 것처럼 머리카락으로도 누구를 죽일 수 없으니 그냥 기르게 해 주면 그만이다. 여자 연예인이 옷 위로 유두를 드러냈다고 죽일 듯이 공격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여성도 신체를 자유롭게 드러내는 게 여권 운동의 일환이던 때가 있는데, 행위는 같고 따라붙는 의미만 다르다. 같은 행위에도 부여되는 의미가 정반대로 다를 수 있다면, 그냥 사람 하고 싶다는 대로 하게 해주는 게 맞지 않나.
"왜 죽으면 안 돼?"
고기를 안 먹을 수도 있는 건데 세상은 그런 영혜를 미쳤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해서 세상은 일반에서 벗어났다고, 비정상으로 몰아 잘라내고 쳐내서 자신들이 믿는 틀에 맞춰 구겨 넣으려 한다. 일반은 일반이지만 예외적인 것들도 일반이다. 없었던 적이 없으니까.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신을 보고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하면서 부정하고, 자꾸 폭력을 가해서 교정하려고 하니까 영혜는 그토록 더 강하게 자연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왜 죽으면 안 되냐"라고 인혜에게 되묻던 영혜. 나도 거기에 대한 세상의 여러 답들에 공감은 잘하지 못하지만 그냥 살고 있다. 죽음을 선택할 용기가 없어서, 그리고 인생에 아직 궁금한 것들이 많아서, 어쩌면 세상에 조금 사랑으로 피어보고 싶어서 라는 이유인 것 같다.
"나는 것은 선택할 수 없지만 가는 것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감의 존엄"이라는 주의를 히키코모리 시절에 세웠는데, 이 생각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상황적으로 벼랑에 몰린 상태가 아닌데도 스스로 가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은 비난이 아니라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앙이 생기거나, 반출생주의, 피투에서 기투로의 전환 등을 공부해 본 후에는 내 생각이 바뀔는지도 모르겠다.
『채식주의자』를 읽다가 『이방인』 생각도 났다. 규범에 따른 세상의 역할극. 규범이 형성되면 규범 자체가 지닌 실재적인 의미보다는 규범을 합리화하는 쪽으로 의미가 발전된다.『이방인』에서도 진지한 고민 없이 주어진 역할극에 몰입해서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뫼르소 시점에서 묘사된다. 뫼르소는 그 역할극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일종의 자살을 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형까지 가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했을 것이다.
역할극에 참여하는 다수가 역할극에서 벗어난 인간들에게 가하는 폭력. 사람에게 역할을 덧씌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자연으로 본다면 그런 폭력이 덜할 텐데.
채식을 시작한 이유를 대답해야 될 때마다 영혜는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말한다. 가여웠다. 영혜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 사람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할 수만 있다.
자신과 다르거나 이해가 안 되면 따돌리고, 무시하고, 괴롭히고, 죽이는 식의 다양한 종류의 폭력을 가하기 일쑤인 세상에서, 한강이라는 사람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마 이 거인 것 같다고 느껴진다.
밖으로는 먹먹함을 느끼면서, 나는 그런 사랑을 하고 있나, 할 수 있나 안으로 물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