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둘레길 6코스
나는 방학 동안에 교외 근무지로 걸어서 출근을 하고 있는데, 항상 비슷한 지점에서 같은 남자를 마주치고 있다. 그 남자도 어딘가를 다니는 길인 것 같다. 출근을 하는 시간이 아주 일정하지는 않지만 편차도 적기 때문인지 거의 매일 같이 보는 것 같다. 비슷한 지점에서 자주 마주치는 여자도 한 명이 있지만, 감자머리에 항상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지나가는 남자 쪽이 더 기억하기 쉽기 때문에 자주 본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도 나를 자주 마주치는 사람이라고 알아보지 않을까? 그 쪽에서는 나를 '분홍 양산 쓰고 가는 남자'쯤의 거리의 배경으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신체 능력을 복구시키기 위해 히키코모리 탈출기에 애를 썼던 것들이 좋은 결과로 돌아온 것인지, 2년이 지난 지금 몸 상태가 꽤 괜찮다. 우짜든동(어찌됐든) 체력과 스태미나가 좋아 놓으면 뭘 해도 유리하다는 걸 생각해서 체력을 잘 발전시키고 보존하기로 유념하고 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체력이 딸려서 불친절해지고, 체력이 딸려서 행복을 쫓아갈 속도를 못 내는 경우가 생긴다는 걸 종종 목격하게 된다. 난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그래서 체력 증진의 일환으로 둘레길을 조금씩 걷거나 뛰고 있다.
둘레길을 걷는 건 방 안에서 지내던 동안 내가 상상하던 일과 비슷하다. 방 안 모니터로 겨우 세상의 쪼가리 따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실물을 보고 누리는 것, 어떻게 그걸 재밌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상상하곤 했었다. '실물의 나'를 게임 속 캐릭터나 아바타라고 생각하고 육성하면서 산다고 생각하면, 현실 세계가 게임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리스폰은 안되지만. 서울둘레길은 게임적 요소를 잘 살린 콘텐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목적과 재미를 모두 갖췄으니 둘레길 산책이 굉장히 즐겁다. 게다가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을 치고 났더니 보는 눈이 아주 조금 생겨서 볼거리도 늘어났다. 저번 4코스 때는 원래라면 그냥 지나쳤을 망우역사문화공원(망우리 공동묘지)에 들러 간단하게 구경을 했다. 세상에 구현된 텍스트들 중에서 그동안 잘 읽히지 않았던 부분들을 좀 더 선명하게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즐거웠다.
이번 6코스에서는 중간에 암사동유적을 들렀다. 주황 리본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익숙한 이름이 보인 것이다. "암사동". 한능검 선사시대 파트에서 신석기 시대 키워드로 '서울 암사동 유적'이 등장하곤 한다.
500원을 내고 입장권을 샀다. 입구에는 100주년 관련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1925년에 있었던 홍수로 암사동에 있는 신석기 시대 집터가 드러났다고 하니, 정확히 1세기가 지난 것이다. 딱 맞아떨어지는 숫자에 기분이 괜히 좋았다.
유적과 박물관을 구경하면서 '움집'이나, '간석기' 같은 문제집 속 텍스트를 실물로 만나니 여간 재밌는 게 아니었다. 분명 학생이었을 때도 비슷한 공부나 체험 학습을 많이 다녔을 텐데 이런 경험과 느낌은 처음 받아 본다. 뒤늦게 의도와 목적에 충실한 진한 현장 체험 학습을 혼자서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코스 막바지에는 이케아 강동점이 보여서 또 샛길로 빠져버렸다. 이케아를 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눈에 보이는 곳에 떡하니 있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개미지옥 같은 곳을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마침 필요했던 물건 몇 개도 운좋게 보게 되어 이것저것 좀 샀다. 첫 이케아라 이런 저런 사소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는데, 이젠 첫 시도라 겪는 문제들에 대해서 불쾌해 하거나 부끄럽다고 생각하거나 하지 않게된 것을 느꼈다. 처음이면 좀 못하고, 좀 헤매고, 좀 어려운 게 맞다.
자잘한 쇼핑을 끝내고 나와서 파란 이케아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남은 코스를 마저 걸었다. 한 코스가 또 끝났다는 걸 알려주는, 빙글빙글 돌면서 내려오는 스탬프가 들어있는 빨간 우체통이 반가웠다.
내가 이곳을 모른다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 서울에 서 있을 때 그런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나를 주눅 들게 만드는. 그래서 남산에서 바라 봤던 서울 시내 산들을 하나씩(실제론 두 개씩) 올랐다. 그리고 이제는 서울의 길들을 걷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런 행동은 캠퍼스를 돌아다닌 것부터 시작된 것 같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두려움, 세상 속에 나왔다는 두려움과 주변 환경과의 연령대 차이에서 오는 두려움, 많은 두려움이 있었다. 더이상 회피하고, 망상만 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캠퍼스 곳곳을 산책했다. 가면 안되는 곳까지 구석구석. 그리고 나랑 상관없는 단과대 건물들을 헤집고 다닌다든지, 학교 행사에 참여해본다든지 했다. 그렇게 두려움을 극복했었다. 그 후로는 학교 밖으로 범위를 점점 넓히는 과정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고, 경험들을 통해 내가 충분히 용기를 찾고, 욕심도 채운다면 그 후로는 굳이 경험을 찾아 다니지도 않게 될 것 같다.
일단은 당분간 서울둘레길 완주를 목표로 달에 한 두번은 코스를 찾아다니는 재미를 가져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