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장학처로부터 방학 동안 일할 근무지 목록을 받았을 때, 한국철도공사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난 현역은 가봤지만 공익은 못 가봤으니 소위 '지하철 공익' 체험 비슷한 것을 해 볼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아서 집 근처 역 중에 하나를 1 지망으로 신청했다. (커버 이미지는 월요일에 처음 타 본 GTX 차량 내부 사진으로, 근무지와는 상관이 없다.)
'지하철 공익'을 여기 내부에서는 '사복'이라고 부른다. 사회복무요원을 줄인 말이다. 스크린도어도 절대로 PSD라고만 부른다. 이런 별 것도 아닌 것들을 알게 되는 게 그렇게 난 재밌다.
국가근로장학생으로서 역에서의 내 근로 내용은 "여객안내, 교통약자 도우미"이다. 밝은 파란색 조끼를 입고 개집표기 근처에 서 있으면서 이용객들에게 화장실이 어딘지, 목적지로 가려면 어느 플랫폼으로 가야 하는지, 어디서 환승하는지 등을 알려주곤 한다. 그리고 승하차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거나, 승하차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해 드리는 경우도 빈번하다.
"찍었는데 안 돼요." 하는 경우가 많다. 안 찍었는데 찍었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고, 시스템을 잘 몰라서 혼동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찍었는데 기계나 카드 문제일 수도 있다.
내 경우에도 지난 2년 동안 딱 한 번, 어디서 환승을 하다가 하차를 찍지 않았던 것 때문에 마지막에 개찰구를 통과하지 못했던 적이 있다. 상당히 어리둥절했었는데 그때 역무원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역무실에서 휴대용 정산기를 들고 나와 뭘 해주셨던 것이었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하는 동안 열차 내 유실물을 찾으러 간 적도 몇 번 있다. 분실 신고가 들어오면 열차 진행 방향 동선 상에 있는 역으로 지시가 내려온다. 그럼 차가 들어올 때 차장에게 유실물 찾겠다고 무전을 하고 선반이나 의자 위를 확인한다. 다시 무전을 할 때까지 열차는 출발하지 않고 기다린다.
이 과정을 신속히 진행하지 못해서, 내가 놓고 내렸던 "선반 위, 검은 삼소나이트 백팩, 노트북 들어있음"은 종착역인 인천까지 갔었다. 그 덕에 차이나타운 구경도 하고 가방은 가방대로 잘 찾았으니 뭐 괜찮다.
내 가방을 찾는 동안 친절하게 응대해 주셨던 여러 역무원 분들을 역무실에서 보고 있다. 물론 사람은 다른 사람이지만 한국철도공사의 역무원으로서의 친절함은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어서 그런지, 같다고도 느껴진다. 보면서 감사함을 느낀다.
근무 기간의 막바지에 있는 와중에, 오늘은 인턴이 예비군 훈련으로 결근하고, 사복도 한 명 결근을 했다. 출근하고 그 소식을 야간조에게 전해 듣고 있는데 한 승객분으로부터 상행 1량 4문 PSD가 오작동한다는 민원을 접수했다. 직원 분에게 보고를 하고 승강장으로 가서 알아서 수습을 했다. 며칠 후면 잃게 될 권한을 만끽한다는 건 재밌는 일이었다.
그리고 두 명 결근으로 근무자가 모자라 1층 안내 부스를 내가 하루 종일 전담했다. 그 덕에 일을 좀 흠씬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장부 상에 빵꾸를 한 번 내고 역무원 분에게 설명을 듣기도 하고, 외국인 관광객들을 안내하기도 했다. 이제서야 이 걸 해보게 됐다는 게 아쉬웠다.
근무를 시작하고 몇 주 지났을 때, 외국인 관광객들이 물어볼 때를 대비해서 몇 가지 멘트를 영어와 일본어로 미리 알아뒀었다. 그동안은 운이 좋아 그런 일이 없었지만 언젠가는 분명 생길 일이었다. 그런데 준비한 것을 써먹어 볼 기회가 생각보다 오지 않다가 최근 며칠 동안 처음으로 몇 번 기회가 왔었고, 대체로 순조롭게 안내를 했다. 굉장히 뿌듯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여기서 오래 일하면 외국어가 늘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오늘 1층 부스를 전담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많이 마주쳤다.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곧바로 claude 선생님에게 문장 몇 개를 받았다. 그것들을 반복해서 말해보면서 외우고 있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외국인 학생을 도와주라며 나를 불렀다. 직전에 안내(실패)한 외국인 관광객 무리와 같은 문제를 겪고 있었다. 머릿속에 '외워졌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말을 해봤다. 다행히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었다.
역시 실전만한 게 없다. 평상시에 머리로 연습을 해보고 준비를 해봐도 실전이 주는 강력한 동기부여와 성취를 따라잡을 수가 없는 것 같다. 일도 하고, 돈도 벌고, 재미도 있고, 외국어 말하기 연습도 할 수 있는 꿀단지가 바닥을 보이고 있다. 오늘따라 재밌었더니 유독 더 아쉬움이 크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