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어디에 서있어도 구석 같은 좁은 방에서 '아무래도 나는 운이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세부적으로 정확히 어떤 내용을 다루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던 [고전읽기:프로이트] 강의 내용이 내 흥미와 너무 잘 맞는다. double, uncanny, 존재/의미, 틈, 공감...
한국사 시험을 치고 나서 책 제목에 대한 친밀감이 생긴 덕분으로 신청할 수 있었던 [고전읽기:삼국유사] 강의에서 생각보다 한국사 공부했던 내용이 너무 많이 도움이 된다.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뒤죽박죽 순서를 알 수 없이 떠다니던 역사와 관련된 단어들이 지식으로 정리돼서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반 의무적으로 걸었던 전화 통화에서 엄마가 해 준 얘기를 듣고도 운이 좋다 생각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경필부에 들어 공책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여러 번 썼다 지웠다 하며 글씨를 연습했다는.
오죽하면 애가 스트레스를 받을까 봐 걱정된 엄마가 선생님께 말씀드려 경필부를 나오도록 했다고 한다. 경필부를 그만두고 나서 나중에 학교에서 열린 경필 대회에서 상을 받아 내 글씨가 학교에 걸렸다고 한다. 노력의 결과지만, 그 노력은 내가 그 부분에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미 대부분의 또래보다 내가 잘하는 걸 알고, 그 사실이 만족스러웠을 것이고, 연습하면 분명 연장자들만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본능적으로 들었을 것이다.
나는 기억을 못 하는 그 이야기를 엄마한테 듣고, 끈기 있는 성격 혹은 본 대로 종이 위에 구현하는데 도움 되는 좋은 관찰력은 내 노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알았다. 운 좋게 타고나서 수고 없이 얻은 것이다.
그런 끈기, 관찰력으로 잘할 수 있었던 일들이 지난 인생에서 정말 많았다. 가장 최근인 그저께에는 따릉이의 최고속도에 근접한 속도로 자전거를 타고 중랑천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다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는, 프로그램에서 한 번 만났던 기지개 센터 청년의 옆모습을 알아봤다. 이름은 모르지만 운동 프로그램에서 같은 팀이었던 청년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볼 수 있었는지 나도 신기할 정도였다.
내 자랑이 되는 끈기와 관찰력 일화들은 많지만 그런 이야기는 자제하고, 그런 끈기를 원천으로 히키코모리 생활도 10년 했다는 것만 언급해야겠다. 아무튼 나는 끈기가 상당히 있는 편이다.
앞으로의 생활과 인생에서도 내 그런 끈기와 끈기를 뒷받침해주는 뛰어난 체력이 엄청난 장점이 돼줄 거라는 게 느껴진다. 원망만 하던 부모님께 감사를 많이 하게 돼서 좋다.
수업 듣다, 책 읽다 했던 생각을 적어놨더니 시로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시를 써봤다. 뜬금없지만 이 글에다가 같이 보관해야겠다. 가을이-, 오긴 하나 보다.
이름보다는 너를 기억해야 할 텐데
긴 말로 설명하기 불편해
짧은 이름을 기억한다
이름이 없으면 부를 수가 없어
끝내 이름을 외웠지만
너는 이름이 아닌데
부르지 않고도
우리가 서로 만지고만 살 수도 있다면
그제야 너를 진정 안다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