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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일상

by 온호

트림을 할 때마다 여섯 시간 전에 먹은 두리안 냄새가 난다. 학교 근처에서 친구와 점심을 먹고 중국 마트에 들러 구경을 하다 호기심에 산 두리안 아이스크림 때문이다.


두리안을 먹어본 적은 없는데 시장 같은 데서 지나다니다가 냄새를 맡아보면 아예 못 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다가 마침 두리안 아이스크림이 있길래 언젠가 먹어 볼 두리안 전에 미리 보기 맛보기로 먹어봤는데, 두리안 먹어 볼 생각은 하면 안 되겠다고 뜻을 굳혔다.


첫 한 입 깨물어 먹었을 때 두리안 향과 함께 굉장히 묵직하고 기름진 맛이 났고, 맛 자체는 맛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스크림에서 가스 같은 것이 흘러나와 내 속을 압박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뭔가가 누르고 들어오는 그 느낌 때문에 거부감이 들어 아이스크림을 먹기가 편하지 않았다.


사소한 호기심을 아이스크림으로 조금이나마 충족시켰다. 호기심이라는 건 대단한 힘이 있는지 쓰다 보니 오후의 결심과는 다르게 맛있는 과일 두리안을 먹어보고 싶어졌다.



토요일인 어제는 생명사랑 밤길 걷기에 참가했다. 1년 만이다. 기지개 센터에서 단체 참가를 하게 됐다. 다른 청년들과 함께 걸으면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는데, 작년처럼 자살 문제에 대한 생각을 가져보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걸었다. 다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살 예방을 위해 기부를 하고, 그저 걷는다는 사실에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


걸으러 온 다른 기지개청년들 중에 나와 같은 권역 청년분이 계셨다. 작년에 내가 청년분들과 레몬청을 같이 만들고 싶어서 권역 복지사님께 부탁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처음 만났다. 그 후에 비폭력대화 수업을 들을 때도 같이 했었다.


반가워서 인사를 드렸더니 그분이 내 이름을 불러주셨다. 나는 그분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센터에 다니면서 처음 있는 경우였다. 근데 그게 죄송스럽기보다는 굉장히 따뜻하고 좋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냥 지나친다고 여긴 사람이 나를 기억해 줬을 때 이런 느낌이 드는구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그런 배려 깊은 행동을 통해서 못 본 동안 그분이 얼마나 삶을 향해, 사람을 향해 많은 걸음을 내딛으셨을지 느껴졌다. 그게 너무 아름다워서 나한테까지 흘러들어와 힘이 됐다.


한편, 자조모임을 자주 함께 하는 내 또래 청년분은 기지개센터 부스에서 서포터스 활동을 하고 있었다. 참가자들이 걷기 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부스를 돌며 기념품을 받는데, 그 참가자들에 시종일관 행복하게 웃으면서 즐겁게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친구들의 순간을 남겨서 전해주는 걸 좋아하는 내 습성이 여지없이 발휘되어서 사진을 멀리서 찍어 놓았다. "내일 일정이 있어" 행사가 끝나고 같이 밥을 먹지는 못한다고 메시지가 왔을 때 "오늘 멋있었다"고 하며 찍어둔 사진을 보냈다. 모두가 눈으로 볼 수 있어도 자기만은 볼 수 없는 행복한 본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으로.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를 잘 풀기 위해 오늘은 잠을 많이 잤다. 밤 잠을 8시간이나 잔 것 같다. 그러고도 다시 눈을 붙여 오전에 또 잠을 잤고, 점심을 먹고도 낮잠을 두 시간 잤다. 주 5일 동안에는 학교를 두 개 다니고 근로 장학을 하고 왕복 1시간 자전거 타기를 하고, 토요일에는 오전에 헌혈을 하고 오후에 봉사활동을 하고 저녁에 걷기를 하니까 일요일에는 나도 잠을 잘 자는 사람들 만큼이나 잘 수 있었던 것 같다. 너무 좋았다. 이번 주 정도의 수준으로 늘 피로를 유지하는 건 어렵겠지만 힌트를 본 것 같다.


미루던 집안일도 돌보았다. 매트리스 방수 커버를 빨았고, 커피가 묻어서 빼놓았던 요도 빨았다. 햇볕에 잘 말려서 집으로 다시 들이니 기분이 좋았다. 어제 만들어둔 양배추당근라페도 적당히 먹어서 양을 줄여두었다. 직접 만든 음식을 음식물쓰레기봉투에 담게 되는 일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일까지 반납해야 하는 책을 아직 다 못 읽어서 대출연장을 했다. 늦기 전에 까먹지 않고 해서 다행이다. 기술교육원에서 필요한 물건들도 다이소에 가서 샀다. "다이소 문턱이 닳아야 해"라고 말하시던 같은 반 동료분의 말씀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새로운 한 주를 대비해서 푹 쉬었고, 정비도 했고, 준비도 했다. 다가올 내일 하루와 다가올 앞날들에 대한 걱정, 두려움이 아래쪽에서부터 어렴풋이 일렁이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의 뒤편에 붙어있는 다른 이름을 생각해 본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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