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뭔 날이었나 보다.
새벽에 드르륵드르륵 차문이 열리고 닫히고 턱턱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아, 앞밭 더덕농사 드디어 시작이구나.
오전 커피타임. 계세요 쿵쿵쿵.
얼마 전 새로 세워둔 전봇대에 전선 연결 작업을 하니 10시부터 두 시간 정도 전기를 못쓴다고 한다. 더덕까지는 그러려니 했는데, 갑자기 심란함이 꿈틀거린다. 우리 집은 우리 집대로 오늘 뒷밭에 감자심기가 예정되어 있었다.
좁디좁은 도로 옆에 개천을 하나 두고 바로 붙은 우리 집. 사방이 밭으로 둘러싸여, 이 정도의 소란함이야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일이라 해도 이렇게 한날한시에 일이 몰리다니. 좁다란 도로가 트랙터와 트럭, 전기공사차량으로 북적북적한 가운데, 감자를 심는 우리를 포함 세 팀의 작업조는 각자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문득문득 웃긴 그런 오전이었다.
오후에는 딸 집에 가기로 했다. 초코와 살 때는 꿈도 못 꿔본 오후 출발, 야밤 귀가 일정이다.
자취하는 자식을 둔 누구나 하는 걱정을 나도 늘 하고 산다. 밥은 잘 먹고 다니나..
작년 초 딸은 대학생이 되었고, 이제 집만 정리되면 시골로 내려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딸의 독립을 늘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자취가 로망이었던 딸이었기에, 본인은 원치 않는데 지낼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시키는 자취가 아니라 그나마 미안함이 덜하긴 했다.
미성년 자녀가 없으면 이혼이 이렇게 쉽다는 걸 해보고 알았다. 신청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면 그 자리에서 확인 기일을 받는데, 그 날짜가 한두 달이 채 안 걸린다. 숙려기간이며, 양육권이며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다. 딸이 성인이 될 때까지 잘 참았다고 나를 칭찬해 줬고, 그때까지만 해도 이혼 별거 아니네 했었다.
딸은 내색을 안 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관심이 없는 건지 지금껏 엄마아빠의 일에 이러쿵저러쿵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나랑도 아빠와도 이전과 다른 없는 태도로 잘 지낸다. 그리고 그게 너무 고맙다. 나는 어린 시절 사이가 좋지 못한 부모님 문제로 마음이 괴로운 적이 많았다. 아니, 늘 힘들었다. 우리 딸한테만은 절대 엄마아빠 일로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마음을 썼다. 하지만 딸이 어렸을 적 우리는 딸 앞에서 너무 많이 싸웠다. 그걸로도 모자라 나는, 우리도 알콩달콩 화목하게 잘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왜 그렇게 힘든 걸까 늘 마음 한구석 그늘진 모습을 나도 모르게 딸에게 보이는 날이 많았을 것이다. 딸이 아무리 어렸어도, 엄마가 웃고 있지만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내가 좀 더 현명한 엄마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딸은 자취를 시작하면서 처음엔 나름 깔끔하게 사는 거 같더니만, 날이 갈수록 방이 흐트러져 갔다.
자취하면서 이 정도 사는 게 어디야, 한 번도 잔소리를 안 하다가 딱 한 번 했었다.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잔소리할 거면 오지 마 그런다. 딱 한 번 했는데.
자기 투룸으로 옮기면 안 되냐는 얘기는 작년 여름부터 했던 것 같다.
그때는 그래, 생각해 보자 그러고 말았었다. 그런데 딸의 바람이 점점 더 확고해졌다. 이 방이 너무 좁아서 정리가 안되니까 자꾸 지저분해진단다. 투룸에 살면서 하나는 옷방으로 쓰고, 다른 공간들은 깔끔하게 하고 살 거란다.
자취 시작하면서 등록금이랑 월세는 엄마 아빠가 쭉 내줄 건데, 생활비는 1학년 때까지만 줄 거라고 미리 말해두었었다. 투룸으로 옮기면 월세는 두 배가 되고, 이젠 생활비도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만 써야 할 건데 되겠어?
된단다. 알바 몇 개 더 할 거고, 월세도 자기가 번 돈으로 보탠단다.
사실은 딸이 강력하게 주장하기 전부터도 방을 옮겨줘야겠다고 차츰 기울고는 있었다.
맘먹어야 갈 수 있는 머나먼 엄마집, 가까이는 있지만 잠깐 사택에 살고 있는 아빠집 말고,
딸한테는 자취방이 그냥 자취방이 아니라 '내 집'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늘 짠하고 안쓰러웠다.
남편도 옮겨주라고 했다. 생활비도 아주 안 줄 수는 없지 않아? 그런다.
그래서 딸은 올 2월에 투룸으로 이사를 했다.
이제는 깔끔한 신축 투룸에서 지내니 작년보다는 내 마음도 한결 편하다.
그렇지만 밥이 늘 문제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엄마표 음식을 좋아했고 잘 먹었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점점 배달음식, 외식을 더 좋아하게 되었지만 자라는 아이 대부분 그런다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우리 딸은 좀 정도가 심했다.
내가 요리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못하지도 않는다. 메뉴는 한정적이긴 하다. 막무가내 한식 파다.
딸은 내 요리 중 좋아하는 딱 몇 가지만 빼고는 언제나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남편은 내 요리를 맛있게 잘 먹었었다.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딸의 반응이 그러하니 요리에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원래도 요리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되고 이유식을 시작하면서부터 줄곧 어차피 평생 해야 하는 요리를 좋아해 보려고 나름 노력(은)했었지만, 도대체 뭘 해야 딸이 맛있게 먹을까 늘 마음은 쓰이면서도 그렇다고 메뉴를 획기적으로 바꿔보려는 노력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찔끔찔끔 나름대로는 공을 들이면서도 매일매일 전전긍긍했다. 이상하게 나는 밥에 집착을 했다.
얼마 전까지는 딸 집 가면서 반찬이며 과일이며 잔뜩 싸가지고 갔었다.
딸을 만나니 기쁘기는 한데, 내 능력치 이상으로 정성을 다하려고 하니 피곤하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를 해가도 그날 맛있게 먹고는 그대로 냉장고에 들어가서 상해가다가 다음번 갈 때 그대로 가져와서 버리고는 했다. 그런 일이 반복이 되자 어차피 또 싸들고 올 텐데 오늘 먹을 거만 해갈까 하다가도 아니야, 어쩌면 이건 잘 먹을지도 몰라, 이제는 잘 챙겨 먹을지도 몰라하면서 부득부득 밥가방을 챙겼다. 그렇게 가지고 가서도 뻔한 자취방 살림에 이거 찾고 저거 찾고 하다 보면 딸이랑 제대로 된 대화도 못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어제는 과일 한 봉지 달랑 가지고 갔다. 나가서 맛있는 거 사주고 오자 했다.
초코를 보내면서 했던 수많은 후회와 아픔을 매일매일 밥처럼 먹는 나의 변화 중 하나다.
그 수많은 후회와 미안함 중에 밥에 대한 부분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자식밥에도 강아지밥에도 이상하게 집착을 했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에 못 미친 듯싶으면 마음이 편지 않았다. 왜일까. 왜 그렇게 나는 밥에 집착을 했을까. 그런 생각을 거듭하면서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나에게는 밥이 사랑이 아니고 의무였구나.
초코에게 좋은 사료를 먹였고, 간식도 늘 채워놓았으며, 초코 배고플까 봐 늘 귀가를 서둘렀었다.
하지만 잘했기 때문에 밥에 관한 기억이 슬프지 않은 게 아니다.
강아지밥도 간식도 온갖 정성을 쏟는 애견인들을 보면 초코에게 많이 미안했었다.
만들어주는 간식이라 해봐야 닭가슴살이랑 고구마랑 계란 노른자 삶아주기가 다였다.
나중에 초코한테 너무 미안하겠다고 문득문득 생각하면서도 미안함만으로 그쳤다.
자식밥을 이야기하면서 초코밥에 대한 이야기를 억지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다. 자식밥과 강아지밥에 대한 경중에 대해 말하는 것도 아니다. 밥 자체가 아니라 내 마음가짐이 나를 아프게 한다. 그리고 어느새 이제는 달라지고 싶어한다.
딸과 밖에 나가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은 글을 쓰는 게 즐겁다는 딸. 남자친구 이야기, 워킹홀리데이에 관한 이야기. 이런저런 이야기. 너무 좋았다..
나는 지금껏 내가 엄마로서 이만큼 노력하고 있다는 자기만족을 사랑으로 착각했구나. 딸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지도 못하고, 편한 엄마도 아니었으면서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 하기만 했구나.. 초코한테는 그마저도 못했구나..
부모님과 살게 되면서 나는 점점 더 요리를 안 하게 되었다. 삼시 세끼를 엄마집에서 먹는다. 그러면서부터 밥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밥보다 잠이 더 고파서, 지금은 안 먹고 싶어 그러면 잠깐 와서 먹고 푹 자라고 한다.
밥을 거르면 큰일 날 것처럼 엄마는 여러 번 권한다.
끝까지 안 먹겠다고 하면 엄마 목소리 톤이 슬프게 내려간다. 때로는 화마저 느껴진다.
뭔가에 열중하여 이거만 다하고 먹고 싶은데, 엄마는 다 차려놓았으니까 얼른 와서 먹고 다시 하란다.
하지만 마음 편하게 차려진 밥을 먹기만 할 수는 없다. 엄마가 요리해 주셨으니 뒷정리는 내가 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러고 나면 하던 일을 다시 하기에는 이미 내 마음이 물 건너간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조용히 혼밥을 하고 싶은 날도 많다. 하지만 엄마가 기다린다.
아, 엄마는 왜 이렇게 밥에 집착하지. 하면서 문득 어느 날 딸이 떠올랐다. 딸도 분명 나에게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왜 저러지?
초코가 아팠을 때도 엄마는 밥. 밥. 초코를 혼자 두고 갈 수 없어 안 간다고 하면 너가 힘을 내야 초코 돌보지 얼른 와. 그래도 안 가면 싸들고 오셨다. 초코를 보내던 날도 엄마는 밥. 밥. 밥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엄마는 굳이 굳이 김밥을 싸셨다. 젊은 시절의 엄마도 나에게 미안한 게 많았던 건가..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있다가도 밥 먹으러 오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으면 눈물을 싹 닦고 건너간다. 이제는 그런다. 그런 날 우리 셋은 조용히 밥을 먹는다. 내가 말을 안 하면 조용하다.
70중 후반인 나의 엄마 아빠는 오늘도 뒷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고 나물을 캔다.
일찍 결혼하면서 몸은 다른 곳에 있었지만 먼 곳에서도 엄마 아빠만 생각하면 힘들었던 나의 지난날.
이곳에서 같이 살면서도 여전히 많은 부분 나랑은 삐걱거리기도 하고, 내 짜증의 반은 엄마 아빠로부터 오지만, 나는 점점 엄마 아빠가 애틋해지고 너무나 소중해진다.
밥은 사랑이라고 목놓아 외치던 적이 있었다.
딸이 일본에서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일주일을 매일 아침마다 울었다. 옆에 사는 한국 아이들과는 잘 노는데, 놀이터에서 만나는 일본 아이들만 보면 엄청 짜증을 내며 화를 내곤 했었다. 말이 안 통해서 그러나 싶어 얼른 일본어에 적응했으면 하는 마음에, 한국에서라면 유치원 갈 나이보다 한 살 적은 나이부터 유치원을 보낸 건데, 유치원은 하루 종일 있어야지, 말도 안 통하는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같이 있는 게 싫었었나 보다.
그 유치원은 점심도시락을 싸서 보내야 했는데, 처음에는 그 조그마한 도시락 하나 채우기가 어찌나 힘든지.. 하지만 딸이 얼른 유치원 생활에 적응해서 재미있게 다니길 바라는 나의 간절한 소망을 꾹꾹 눌러 담아 정성스레 쌌다. 엄마의 소망과 사랑을 듬뿍 담아 딸을 응원해주고 싶었다. 일주일을 울며불며 유치원 버스를 타던 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후 너무나 즐겁게 유치원 생활을 했다.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내 마음이 핑크빛 행복으로 물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