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레테의 강 앞에서

by 사파이어

눈부신 햇살에 잠시 찬란한 아침이다.


지난 주 어느 오전. 텃밭에 고추 모종이랑 알타리 씨를 심었다.

고추는 금세 심었는데, 알타리 씨는 흙을 한 줄로 얕게 파서 간격 맞추어 한알 한알 뿌리고 덮어줘야 하는 세심한 작업이다 보니 시간이 꽤 걸렸다.

막 내리쬐기 시작하는 오전의 햇살에 슬슬 등과 얼굴에서 열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더니, 얼굴은 한껏 달아오르고 땀이 진득하게 눌러 붙은 등과 목이 견딜 수 없이 간지러워졌다. 햇볕과 땀에 취약한 나의 피부가 원망스러운 계절이 돌아왔다.


이제부터 오전에는 절대로 흙을 밟지 않을거라고 조용히 또 다짐했다. 이 얼마나 소박하고 행복에 겨운 삶인지 모르겠다. 다만 지금의 내가 그 행복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니 착잡할 뿐이다.

잠시나마 기운 뻗치는 아침 시간에는 글을 쓰고 싶다. 햇살 한가운데 앉아 내 안에 있고 싶다. 왠지 모를 어색함에 햇볕 알레르기 핑계를 댄다.

밤은 무섭지만 일부러 불을 켜고 싶지는 않다. 누워만 있고 싶다. 어둠 속에서는 바깥 세상이 궁금하다.


멍하니 보고, 듣고, 느끼며, 뿌연 안개 속에 오래도록 있었다. 그렇게 내 것이 아닌 듯 지나쳐온 그 모든 시간 속에 늘 두리뭉실한 덩어리가 떠다니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 느낌들이 좀 더 명확해지는 날이 오겠거니, 시간이 지나면 말할 수 있겠거니, 실은 게으름이면서 애써 변명했다. 가끔씩 일기장에 붙잡아두기도 했으니 뭔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직 아무 것도 하지 못했는데, 내 안에 꽁꽁 갇혀 조금씩 몸집만 불리던 그 덩어리가, 이대로라면 제풀에 지쳐 슬금슬금 해체되어 결국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 될 지도 모른다. 어쩌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다 못해 빵 터져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지도 모른다. 속절없는 눈물에 다 녹아버릴 지도 모른다. 두렵다. 얼른 붙잡아야겠다.


내 강아지와의 12년이 뿌옇다. 덩어리들을 잘게잘게 써느라 애를 써본다. 이렇게 희미한데 정말 사랑이었을까, 그래서 또 마음이 따끔거린다. 어쩌면 맘껏 아프기로 작정을 한 나의 마음이 기억회로를 멋대로 조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부지런히 내 안에 있어야 한다. 뜻밖의 것들이 지금의 나를 붙잡아 일으켜 줄 지도 모르니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하늘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