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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덤한 슬픔

by 사파이어

지금 여기, 나의 모습은 뭐 하나 내세울 것도, 마음에 드는 구석도 없어서 쓰면 쓸수록 한숨만 나오기 때문인지 긴 호흡의 글은 아주 쥐어짜내야 겨우 써진다. 그렇지만 쓰고 싶다.


무지렁이 같은 나의 마음을 이만큼이나마 끌어올린 게 어딘가. 열 평 남짓한 작은 집, 그보다는 조금 넓은 마당이 전부인 지금의 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되새김질이다. 흐릿한 단편의 조각일지언정 하나하나 매만지다 보면 언젠가는 조각보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쓴다.


쓰던 나는 그럼 어땠지? 올 1월에 문득, 무려 십여 년 전에 쓴 게 마지막인 내 블로그를 쭉 훑어보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하고 싶은 말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읽으면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러면서도 30대의 내가 쓴 글에 50대의 내가 위안을 받기도 한다.


투박한, 해맑은, 조용한, 덤덤한, 아련한, 찌질한, 촌스러운, 먹먹한.. 슬픔. 나는 이런 슬픔에 끌리는 사람인가. 참 한결같다.

투박하지만 따뜻했던 젊은 남편에 대한 기억은 한참 뒷번호 슬픔인 건가. 아직은 건드리고 싶지 않다.

그랬던 내 남편의 어머니는 이제 막 새색시였던 어린 내 가슴에 아주 커다란 못을 대놓고 박아 두셨다. 어렸을 적에는 해맑고 착했던 내 아들이 너 만나고부터 인상이 변했다는데 나는 그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나. 너 착한 거 빼고는 마음에 드는 거 하나도 없다 하시는데, 설마 그때 나 웃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이제는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박힌 못자리는 문득문득 찌르르하다. 나 안 보고 사니 남편 인상은 좀 폈으려나.


브런치 생활이 어렵다. 과거의 글을 가져와 이렇게 연명해 본다. 어쩌겠는가. 나는 덤덤한 슬픔에 대해 말하고 싶고 그럴 때는 그녀가 생각나는데. 브런치는 붙잡고 있고 싶은데.




좋아하는 일본 가수가 누구예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잠시 생각..

b'z 하고 아무로 나미에요.

아무로 나미에는 일본에 오기 전 책에서 먼저 알았다. 일본 열도를 뒤흔든 작지만 엄청난 파워의 소유자라고 했다.

일본 TV를 보면서 아무로 나미에 어디 안 나오나, 내 눈으로 직접 한 번 보고 싶었다.

누구길래..


일본에서 처음 생활한 것이 1998년이었는데, 그때 아무로 나미에는 벌써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고, 임신과 출산으로 한동안 가수 생활을 접고 있다가 다시 새로운 음반을 내고 복귀할 즈음이었던 거 같다.


어느 날 우연히 본 프로그램에서 아무로 나미에를 드디어 볼 수 있었다. 그때 불렀던 노래는 'I have never seen'이었다.

위아래 검정 의상을 입고 느리면서도 파워풀한 곡에 맞추어 춤을 추는 그녀를 보면서, 음.. 과연 카리스마는 있군. 근데 춤은 생각보다 별론데. 그래도 멋지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로 나미에가 너무 좋아서 그녀에게 푹 빠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아무로 나미에가 내 마음에 쑤욱 들어온 건 몇 개 월 후(좀 가물가물) 그녀의 생에 너무도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다. 그녀의 엄마가 이혼한 전남편의 이복동생(아마도 그렇게 기억한다)에게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레게 헤어스타일로 깜짝 변신을 한 그녀. 그녀는 예전부터 그 헤어스타일이 해 보고 싶었다고 했다.

죽음, 장례식. 슬프고도 차디찬 검정 의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헤어 스타일을 한 채 눈물 흘리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토록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으니 과연 대중 앞에 나와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출 수 있을까.. 했었다. 그런데 한 달이나 채 되었을까. 내 기억으론 그렇다. 그녀가 방송에 나와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그리고선 그때 한창 인기 있었던 'respect power of love'를 불렀다. 춤과 함께.

그런 아무로에게 왠지 모를 커다란 슬픔을 느꼈다.


시간은 한참 지나서 한국으로 돌아와 강원도에 살았다. 그때의 나는 아직 엄마가 아니었고, 남편이 출근하면 도서관에 가서 책 읽는 시간이 제일 좋았고 행복했다. 딱히 공부할 게 있었던 것도 아니고 특별히 관심 가지고 있던 분야도 없었다. 그저 끌리는 대로 집어 들어 읽었다.


우연히 '약속'이라는 제목의 아무로 나미에 엄마가 쓴 책이 눈에 띄어 빼들고서는 읽었는데.

가슴 아프게 저 세상으로 간 사람의 글이어서 그랬을까. 화려해 보이기만 하는 가수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여서 그랬을까.

읽는 내내 맘이 싸아했고, 그 내용은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은 이미지로 떠오른다.

그 책을 읽고 나서 아.. 뭔지 모를 슬픔의 정체가 이거였나. 웃고 있어도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커다란 눈망울의 그녀.


그러고 나서 한 동안은 아무로 나미에가 어찌 살아가는지, 그녀 엄마의 소원대로 절대로 이혼 같은 거 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가는지 궁금해만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들은 그녀의 소식 하나. 이혼을 했고 아들은 남편이 키운다 한다.

지금은 그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노래를 부르는 그녀.

사실 난 아무로 나미에 노래를 그다지 많이 알지 못한다. 그녀의 음악에 진지하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심심풀이 땅콩으로 어딜 가나 들을 수 있는 스타의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로 한 번쯤은 들려올 법도 한데, 왜 이혼을 한 건지 그저 궁금해만 하고 있다.


웃고 있어도 슬픈 눈망울의 그녀.

슬퍼도 슬프다 내색하지 않고 기뻐도 호들갑 떨지 않는, 왠지 세상 모든 일에 덤덤할 것만 같은 그녀.


그런 무덤덤한 슬픔에 난 자꾸 끌리고, 슬플 때는 그녀가 떠오른다.


-2007.3.6. 내 블로그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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