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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진짜 비밀 中

<그녀의 진짜 비밀> 시리즈

by 콩돌이 아빠
<그녀의 진짜 비밀: 하나 됨> 22 x 14 cm, 콘셉트 드로잉 북, 종이에 펜과 18k 금박 2019

"안녕하세요, 어머님! 네~ 네. 잘 치렀습니다. 하객들도 많이 오셨고, 가족분들도 모두 좋아하셨어요. 아! 다음 달이면 다시 출국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저 어머님, 혹시... 저희 내외가 지낼만한 곳이 있을지요. 엘에이 월세가 너무 비싸서요."


콩돌이 엄마는 제가 살던 동네로부터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유학을 왔고, 저희는 태평양 건너 검은 머리에 갈색눈이 무척 눈에 띄는 지역에서 친숙한 외모덕에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가까워진 저희는 지상 최고의 화창한 날씨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면 비록 흉내뿐일지라도 어려서부터 먹던 음식을 만들어 먹고, 해가 지날수록 고달파지는 타지생활을 서로 의지하며 버텼습니다.


졸업을 할 무렵 어느덧 30대 초반이 되자 '너희 마음대로 살아도 좋으니 일단 결혼부터'라는 가족의 간청과 더불어 일사천리로 식을 치렀고, 콩돌이 아빠와 엄마는 국내 명소를 들르며 소박하고 행복한 신혼여행을 보냈습니다. 이후 결혼식을 참석해주신 분들께 감사인사를 전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려 하자 그간 학교라는 울타리가 막아내주던 까끌까끌한 현실이 피부에 비비며 달라붙는 듯했습니다.


미국 내 체류 신분(VISA), 의료보험, 그리고 살인적인 월세. 집을 구하는 일은 말 그대로 눈앞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시커멓게 물들여 갔습니다. 불안정한 신분과 그로 인한 안정적인 수입원을 마련할 수 없던 당시의 상황은 그 어떤 임대인에게 환영받을 수 없었고, 저는 그간 걱정없이 몸을 누이던 기숙사와 홈스테이 따위가 간절해졌습니다.


미국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가까운 친지보다 더 정겹게 왕래하던 아버지 친구 내외분이 있습니다. 괘씸스럽게 필요할 때만 전화로 아쉬운 소리를 전하며 실질적인 방법을 묻곤 했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집도 절도 없는' 저희 부부가 그저 안전하기만 하다면 괜찮을 숙소를 찾고 있다는 말을 수화기 너머의 아주머니께 고꾸라지는 주유소 풍선처럼 거푸 절을 하며 건넸습니다. 그리고 아주머니께서는 정원에 수영장이 있는, 빈방이 넉넉한 지인의 집을 추천하셨습니다.




2016년 한국의 여름은 닭백숙을 하려 물을 끓인 가마솥 안처럼 습하고, 땅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더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간신히 엘에이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 편에 오른 신혼부부는 만 피트를 훌쩍 오른 하늘 한가운데에서 서서히 공기가 바뀌는 것을 상상하며 도착지까지 휴식을 취했습니다. 비유가 아닌 실제 사막에 계획도시로 세워진 엘에이와 주변 카운티 도시의 8월은 한국의 여름과는 다르게 타들어가는 뜨거움에 몸이 바스러지는 듯합니다.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상경한 시골쥐 같은 부부는 '아는 분의 아는 분의 아는 분'을 통해 방이 여러 채 비어있는 큰 집에 이민가방을 쓰러뜨려놓고 그중 볕이 잘 드는 아담한 공간에 짐을 풀었습니다.


번뜩이는 광택을 내뿜는 새살림과 깨끗이 도배된 벽면을 배경으로한 신혼이 아닌, 남의 집 방 한 칸에서 말소리를 속삭이며 만난적 없는 사람들의 사진에 둘러싸인채 저희는 결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네 집처럼 편하게 생활하라'는 주인아주머니의 당부는 몇 차례 저의 진심 어린 편안한 행동에 은근한 눈총으로 바뀌었고, 날이 바뀔수록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졌습니다.


당시 살던 집에는 나이가 든 진돗개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성견이 되기 전에 같이 지내던 개에게 물린 후 주변에 인기척이 있으면 두 다리 사이에 꼬리를 말아 넣고 서둘러 몸을 숨기던 겁 많은 개였습니다. 외출이 잦은 주인 아주머니는 우그러진 스테인리스 그릇에 사료를 한가득 부어주고 며칠에서 한두 주 집을 비우기도 했지요. 고풍스러운 아치형 다리처럼 근사한 호를 그리며 달라붙은 진돗개의 뱃가죽과 푸석푸석한 털은 그 집의 건조한 공기처럼 헛헛해보였습니다.


아주머니가 출가한 자녀에게로 떠나 한참 돌아오지 않던 어느 날, 외출을 하고 돌아온 저는 집안에 잠입한 진돗개가 남겨놓은 흙먼지 발자국을 거실 소파에서 보았습니다. 소파 등받이에 맞닿은 벽은 창문으로 훤히 뚫려있었고, 아마 개는 창문 너머 바깥을 바라보며 끝이 없는 무료함과 그저 배고프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먹는 사료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심적 상처를 입은 가여운 개를 돌보고, 주인 아주머니와 함께 지붕수리와 대문 도색을 도우며 '나도 편안한 우리만의 공간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몇천 불을 우습게 호가하는 아파트 시세에 서둘러 인터넷 오른쪽 상단 엑스버튼을 누르며 입주 비용, 아늑한 집의 사진과 함께 부푼 희망을 서둘러 지우곤했지요. 캘리포니아 햇살처럼 밝던 제 얼굴에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고 어느덧 수개월이 훌쩍 흘렀습니다. 콩돌이 엄마는 미국에서 취업을 고민하다가 개인 작업을 하기로 계획을 변경했고, 저는 어떻게든 신분을 해결하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통해 '일 할 수 있는 비자'로 전환하려 발버둥 쳤습니다.


그리고 제45대 미국대선이 시작되었습니다.




<공중드로잉 시리즈: 구형의 구 no.1> 지름 182 cm, 나일론 섬유, 실, 아크릴 물감 2017

"Make America Great Again!"


가슴이 기대를 끌어내리며 발끝까지 '쿵!'하고 떨어집니다. 수많은 입들이 한뜻으로 당선을 예상했던 힐러리여사는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복잡한 미국 선거방식에 고배를 마시며 화려한 무대 조명 바깥으로 사라졌습니다. 미국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이민자들, 간절한 계획을 꾸리던 국제학생들은 경악하며 앞으로 다가올 홀대와 혹독한 현실에 몸서리 쳤습니다.


앞에 산책을 나가면 흔히 볼 수 있을법한 2미터 가까운 큰 키에 불룩한 배를 내민 백인 아저씨는 다채로운 혐오발언을 쏟아내며 공과금과 모기지론에 허덕이는 노동자, 중산층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었고, 돌풍과 같은 기세로 대통령자리에 올랐습니다. 단 한 사람의 자리가 바뀌었다고 생각했지만, 당장 거리에서 차마 입밖에 못 낼 욕지기를 쏟아내는 광기 어린 눈의 백인 남성을 스쳐지나 보내며 '큰 일이다'라는 말이 얼굴에 그늘처럼 드리워졌습니다.


수천 불이 연속으로 부서져 나가고 몇 개월을 예상했던 비자수속기간은 1년을 넘겼습니다. 동부의 멋진 미술관으로 이동해 나일론 줄과 실을 꼬아 만든 공이 완성되던 날, 제 첫 번째 비자서류는 이민국으로부터 거절되었고 저는 보스턴 호수 벤치에 앉아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습니다. 자전거 경적같은 거위들의 울음소리를 곁에두고 아내의 작고 부드러운 손이 저의 처진어깨를 도닥였습니다. 그러나 미움은 또 다른 미움을 길러냈고 제 봄나물같이 여린 성정에도 서서히 증오의 싹이 자라 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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