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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진짜 비밀 上

<그녀의 진짜 비밀> 시리즈

by 콩돌이 아빠
<그녀의 진짜 비밀의 패널 스케치> '아빠가 전시를 준비하는 드로잉' 노트 중, 20.5 x 14.5 cm, 종이에 펜 2022

"이모, 가지 마."


"... 이모 7년 이따가 올게."


"7년?"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13평 시민아파트. 어렴풋한 기억에 이모와 형, 그리고 지금의 콩돌이 나이였던 저는 작은방에 어깨를 서로 맞대고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성격의 저는 팔을 편히 뻗을 여분의 틈이 없던 잠자리에 알밤 같은 이마를 벽에 콩콩 부딪히며 짜증을 부렸고, 이모는 손바닥으로 저의 머리를 감싸며 연신 미안해했습니다.


싱거운 농담을 하며 주변 기분을 풀어주던 외할아버지와 이모는 정말 유치원 졸업사진의 제 모습과 닮아있습니다. 외딴 서울살이에 돈을 벌며 아들 둘을 돌보기에 힘이 부쳐하던 엄마는 저를 이모에게 부탁했습니다. 하얀 망토를 두르고 너풀대는 군청색 바지를 입은 손오반이 아버지의 도복보다는 피콜로 아저씨의 나메크성 옷에서 본인의 정체성을 찾듯, 저도 씻겨주고 유치원에 데려다주던 이모의 영혼에 물들어간 것 같습니다.


1990년대 초, American Dream을 위해 전 세계에서 이주민들이 미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열심히 노력하면 영화에서 보던 근사한 2층 집에서 오븐에 칠면조 요리를 구워 식사를 하며, 영어를 쓰는 자식들과 함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어머니의 두 자매 (둘째 이모와 막내이모)는 JFK 공항행 항공에 오릅니다. 이모에게 온갖 투정을 쏟으며 어린 마음을 의지했던 저는 이모가 떠난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그녀가 돌아온다던 7년을 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진짜 비밀: 하나 됨> 16 x 23 cm, 콘셉트 드로잉 북, 종이에 연필과 펜, 2019


닌텐도 게임보이, 스니커즈와 M&N 초콜릿, 나이키 옷과 코스트코에서 산 영양제 등. 이모가 돌아오는 날짜를 세어가던 조그만 손은 무럭무럭 길어졌고, 더 이상 이모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에 그녀를 대신한 소포가 집으로 도착하곤 했습니다. 한창 성장해 나가던 우리나라의 산업에 비해 당시의 미제 물품은 마치 외계인이 인간 능력 밖에서 만들어낸 것과 같았고, 알아볼 수 없는 구부러진 글씨로 쓰인 살림이 집안에 자리하고 있으면 우리 가족을 찾는 손님에게 은근한 부를 뽐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형과 게임보이를 주고받으며 단 몇 시간 만에 건전지를 방전시켰고, 들어 올리기조차 버거운 소포 안의 간식거리를 야금야금 먹어대며 '자유'와 '자본주의'의 맛을 만끽했습니다.


소포 안의 물품상자 사이에는 모피코트와 선글라스로 멋을 낸 이모가족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 허드슨 리버를 배경으로 촬영한 즉석사진이 끼워져 들어있었고, 이런 사진은 이모가 떠난 우리 작은 아파트와 더욱 대비되어 보였습니다. 자신이 돌보던 어린 조카에게 찬송가를 가르치며 하나님 사랑에 두 손 모아 감사기도를 그리던 그녀는 정말 천국같이 평화로운 신세계에서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도착하면 바로 전화하고, 어디 가나 예의 바르게 행동해라."


약 20년이 조금 지나 저는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행 비행편에 올랐습니다. 이모가 펼쳐 보인 미국의 권위가 수년에 걸쳐서 몸 전체로 번져나갔고, 무의식인지 아니면 철저한 계획이었는지 저는 20대 후반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비행기에 올라 이륙하는 순간 느낀 쾌감은 현생에서 인내하며 덕을 쌓아 천국으로 향하는 터널을 지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은은한 세제향과 다양한 인종이 비벼놓은 체취가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기내는 '새 삶'에 대한 표식처럼 낯설었습니다. 어느덧 13시간의 비행이 요동치며 땅에 안착하는 비행기바퀴의 마찰음과 함께 끝이 났고,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카펫이 깔린 바닥'에 첫걸음을 내딛을 때 저는 자식처럼 돌보던 조카와 떨어져 미국 땅에 몸을 들인 이모의 모습이 눈가에 어른거렸습니다.


<그의 일> '아빠가 전시를 준비하는 드로잉' 노트 중, 50 x 34 cm, 종이에 연필과 수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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