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가족, 상담까지 곳곳을 떠올리다가 마음을 터놓을 상대를 찾지 못하면 글을 쓰게 됩니다. 독한 말이나 참혹한 가슴속의 응어리를 종이 위에 차분히 써내리다가 손글씨의 속도가 마음에서 쏟아지는 말을 쫓아가지 못하면 글씨가 낙서처럼 휘어지기 시작하지요. 그리고 손마디와 손목이 뻐근해질 무렵이면 어떻게든 가슴의 한을 풀어내고 싶었던 초심은 사라지고 빨리 드러눕고픈 생각만 굴뚝같아집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소설을 써낸 작가의 유작도, 벌써 몇 십 년째 '수필집' 하면 떠오르는 스님의 책도 작가 본인의 마지막 당부와 함께 부디 세상에서 잊히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잊히고 싶었던 바람은 그보다 몇 곱절은 더 큰 힘으로 사람들에게 당겨져 읽히고, 또 출판되고, 표지를 바꿔서 재판되고 있습니다. 감히 비할바가 못되지만, 저 역시도 절대 읽히고 싶지 않은 글을 작은 종이조각에 적어 누구도 펼치지 않던 책 사이에 끼워 넣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차!' 하는 순간에 느닷없이 그 책을 집어든 가족은 휘리릭 책을 넘겼고 공중에 춤추듯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저의 창피한 속내를 마치 슬로 모션과 같이 바라만 보던 때가 떠오릅니다.
2022년 1월경, 저희 세 식구와 귀국 한 이후 다시 찾은 로스앤젤레스는 저 없이도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라라랜드>에서 적절한 과장으로 표현한 교통체증과 거리마다 그림자와 함께 묻혀있는 노숙자들은 여전했고, 제가 사랑하는 Hammer Museum과 엘에이 시립미술관 (LACMA)은 늘 그렇듯 몹시 세련되어서 입장할 때마다 약간 긴장이 됐습니다.
<Yoshimoto Nara: Retrospective>
워낙 대형 작가이기에 이름만 들어도 그림의 이미지가 머리에 섬광처럼 스쳐갑니다. 뾰로통한 표정의 봉제인형처럼 생긴 소녀들이 화면에 그득한 캔버스, 그리고 '본인이 그린게 맞나?' 싶을 정도의, 마치 심심한 여자아이가 바닥에 턱을 괴고 그린 듯한, 낙서들로 거대한 미술관이 가득 찼습니다.
이중섭이 갖은 고생을 치르며 담배 종이에 끄적인 그림이 빈틈없이 정제된 표구 속에서 단단한 마스터 피스가 됩니다. 요시모토 나라가 그려낸 셀 수 없이 많은 드로잉들도 나무 액자의 위엄에 몸을 맡기고 서로 모이듯 흩어지며 장관을 이룹니다. 당시의 전시를 본 콩돌이 아빠는 그리도 상사병을 앓던 서도호 작가의 뉴욕 아파트만큼이나 '군집된 사소한 낙서'의 힘에 흠뻑 감동했습니다.
'그래... 만드는 거 하나하나 몇 주, 몇 달씩 걸리면 너무 힘드니까.'
저는 열심히, 그리고 꼼꼼히 작업합니다. 그리고 입이 떡 벌어지는 노동량에 놀란 사람들이 저와 제가 만든 것들에 관심을 가져주면 괜스레 울컥합니다. 모두가 잠든 취침 시간 이후 야외 쓰레기장에서 혼자 묵묵히 수백 명의 오물들을 정리하고 왔을 때, 말없이 어깨를 두드리며 라면 한 봉지를 건네는 군대 선임의 피곤한 얼굴을 보던 기분과 비슷합니다. 심혈을 다해 만든 작업은 뿌듯하지만 시간 지체가 심하기에 그만큼 지치기 십상이지요. 저는 LACMA에서 감명받은 쉽고 가벼운 드로잉을, 이 전에도 손을 풀 겸 해왔지만, 본격적으로 하루에 두어 장씩 쌓아나갔습니다.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무심코 흘려들은 말이 기억납니다. '창작은 샘물과 같아서 길어내면 더 좋은 것이 솟아난다.'는 식의 평론이었는데, 매일 몇 개씩 휘갈기는 드로잉이 제게 그 기분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연필, 볼펜, 사인펜, 붓 등 짚히는 대로 사용하여 이런저런 것들을 담아낸 얇은 종이들이 작업실 벽면에 가득 붙여진 모습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낱낱의 낙서들은 또 다른 이야기들을 끌어들였고 그에서 파생되는 소재들로 입체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으로도 이어졌습니다. 그때, 누리끼리해진 책의 틈에서 가을 낙엽처럼 너풀거리며 떨어져 내리던 저의 적나라한 글과 쪽지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다시금 바라본 낙서와 그 근처에 좁쌀같이 쓴 글들은 아직 봐줄 만했고, 당장 누가 빤히 들여다보아도 낯부끄러 울정도는 아니라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이후 며칠을 '읽을만한, 민망하지 않은 글'을 써야 한다는 자기 검열에 눈치를 살피며 어색한 낙서와 뻣뻣한 글자들을 꾸역꾸역 쑤셔 넣었습니다.
"빵빠아아앙!!"
아내와 콩돌이를 차에 태우고 요란하게 자동차 경적을 울려댑니다. 저는 길을 많이 헤매고 기계를 보면 망가뜨리지는 않을까 손이 떨려옵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신경 써야 하는 것이 자동차인데, 그렇기에 남들보다 더 조심히 운전하곤 하지요.
그날은 유독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려서는 부모님이 해주던 일들, 미국에서 지낼 때는 홀몸으로 밤을 새워서라도 해결하던 일들이 무너진 뚝에서 밀려드는 물처럼 목 끝까지 차올랐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곤욕스러운 전화를 하고 집을 치우고 우당탕 작업실로 내려와서 의자에 앉았습니다. 힐끗 본 시계는 제게 한 시간도 채 주지 않았고, 저는 멍하니 십여분을 보내다가 작업에 손을 대는 시늉만 한 후 다시 문을 닫고 나왔습니다.
마음이 너무 급한 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또 도로에 갇혀서 컴컴해진 밤길을 뚫고 지났습니다. '이 나이 먹도록 뭐 한 거지?', '전시가 엉망진창이 되어서 비웃음을 사면 어쩌지?', '작업실에 매달아 놓은 패널은 또 떨어지지 않을까?' 예상 가능한 최악의 상황들이 속삭이듯 귓전에서 떠나지를 않았고, 저는 속에서 치솟는 불길을 해소하기 위해서 자동차 경적을 울려댔습니다.
"왜, 정초에 항상 이 모양이야!! 어이구 확 차를 받아버릴까 보다!"
사촌형제들을 만나서 놀 생각에 들뜨던 명절이 중고등학교를 진학하자 그리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큰집을 찾을 때면 어김없이 터져 나오는 아버지의 고성과 어머니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면 먹지도 않은 전과 떡이 가슴팍에 꽉 들어차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은 새해 벽두임에도 집안은 긴장이 가득했고, 아버지는 차례를 지내러 가는 도로 위에서 폭발하는 화산 같은 무시무시한 말들로 당신보다 머리 하나씩 더 큰 아들들을 덜덜 떨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그 내달리던 차의 속도, 비틀거리던 운전대와 일그러진 아버지의 얼굴은 절대 이해하고 싶지 않았고, 덕분에 제가 운전을 할 때면 신중히 주변을 살피곤 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 습관처럼 만들어내는 또 다른 하루처럼 어느덧 나이를 먹고 칠흑 같던 사방에 경적을 울려대는 스스로를 보며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와 아버지가 잘못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아들이 아빠가 되는 드로잉> 전경
제가 그리도 사모하던 미술관 전시실. 우연히 찾을 때마다 '내가 만약 여기서 전시를 한다면...'이라는 기분좋은 상상과 함께 저의 전시를 수십 번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꿈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만) 기적과 같이 소마 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성사되었고, 저는 삐걱삐걱 걸어내려 가던 나무 경사로에 상상한 것과 유사하게 60여 점의 드로잉을 빼곡히 매달았습니다.
설치물들이 말썽을 피우고, 저도 점점 욕심이 생겨서 전시 오픈 1초 전까지 벽면 페인트칠을 하다가 손이 물감 범벅이 되었고 그렇게 개인전을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때로는 수십 명이 제 작은 드로잉과 글씨에 코를 붙이듯 가까이 다가가 내용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몇몇은 폭소를, 어떤 분들은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고, 가끔 저를 직접 찾아와 이런저런 말을 건네는 분도 계셨습니다.
황금빛 한복을 입은 아버지는 전시 첫날 미술관 일정이 종료될 무렵 가족들과 함께 찾아오셨습니다. 사소한 일에 골머리를 썩는 것을 싫어하는 엄마는 뭐 이리 글씨가 작냐는 투정과 함께 스치듯 그림을 지나갔고,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안경집을 꺼내어 돋보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저는 작업실에서 그랬듯이 빠르게 '괜히 쓴 글'은 없는지 스캐닝 했습니다. 만약 제가 아랍어를 할 수 있었다면 구불구불한 아랍어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썼을 글들 중 아버지가 경적을 울려대며 신경질을 내던 글이 흘려 쓴 영어로 적혀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깨알 같은 한글을 천천히 훑어 내려가셨고, 자동차 위에 두툼하게 얹혀있는 영어 글씨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고 경사로를 걸어 내려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