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진짜 비밀: 하나 됨 white no.1> 167 x 162 x 45 cm, 나일론 & 폴리에스터 섬유, 아크릴물감과 18k 금박 2019
로스앤젤레스의 겨울은 볕이 스치듯 사라집니다. 새벽 내내 실을 꼬고 드로잉을 끄적이다 보면 동이 텄고, 온몸이 쑤셔서 이불에 엎드리면 작업을 하다가 꿈속에 들어간 건지, 작업하는 꿈을 꾼 건지 애매했습니다. 실컷 잠을 잔 후 눈을 뜨면 시간은 벌써 오후가 되었고, 해는 서운하다는 듯이 누르스름히 색을 바꾸고 그림자를 늘이기 시작했습니다.
열네 통의 추천서를 구걸했고, 짜내고 다시 말린 오징어를 또 짜내듯이 경력과 증명 따위를 훑어 모아서 두 번째 비자서류를 제출했습니다. 군대에서 수능을 치는 꿈에서 깨보니 입대 전날인 상황보다 수십 배의 스트레스가 머리를 짓눌렀습니다. 특히 연락이 소원해진 분들께 뜬금없이 추천서를 부탁하는 일을 통과하고 일면식도 없는 분들에게까지 '추천서' 라는 단어를 건넬 때의 무안함은 정말 짜릿했습니다. 내가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말이 입을 벌려 나오는 것을 소름 끼쳐하며 지켜보는 것인지... 생각해 보면 둘 다였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서류 제출, 대기, 추가 서류 요청, 또 다시 대기. VISA라고 빼곡하게 써진 노끈으로 손발이 똘똘 묶여있는 기분과 함께 1년 넘게 지냈습니다. 결국 심사는 승인되었고, 콩돌이 아빠는 찔끔 눈물을 짜내며 콩돌이 엄마와 부둥켜안고 방정스럽게 웃어댔습니다. 가끔 그때를 생각해 보면 '돌아갈 나라가 없는 난민도 아닌데 왜 그리 잔류에 집착했는지' 제 스스로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잘 있어. 미안해."
1년 몇 개월이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뜨니 '휙-'하고 지났고, 저희는 획득한 새신분과 함께 이민가방에 짐을 챙겨 그간 신세를 지던 방을 빠져나왔습니다. 현관을 떠나기 전, 맞은편 뒤뜰을 막고 있는 베란다 통유리에는 제가 돌봐주어 살이 오르고 털색이 밝아진 진돗개가 방충망에 코를 붙이고 물끄러미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문을 닫기 전, 아무도 없는 거실 소파에 우뚝 올라서 창밖을 바라보던 개의 모습이 눈에 선했고, 혼자 떠나는 저의 밑창 닳은 운동화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진돗개에게 많이 미안했고 지금도 그 기분이 남아있습니다.
엘에이 시내 안에 그나마 월세가격이 낮은 아파트로 들어왔습니다. 으슥한 지역 분위기에 함부로 밖으로 나갈 수 없어 가구마다 날카로운 창끝 모양의 울타리들이 서로 간의 영역을 둘러막은 동네였지만, 처음으로 시골쥐 부부에게만 허락된 공간을 정리하자 콧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소라게처럼 등짝에 짐이 실릴 수 있게 불필요한 물품은 챙겨본 적이 없었음에도 새로 이사 온 원배드 아파트는 바늘 하나 꽂을 틈 없이 꽉 찼습니다. 그렇게 햇볕이 잘 들지 않아 늘 어두웠지만 꿈결같이 아늑했던 둘만의 신혼 셋방살이를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진짜 비밀: Like the Night Comes> 단채널 비디오, 가변크기, 6분 루프애니메이션 2019
"다녀올게."
제가 살던 한인타운 외각은 자동차로 베버리힐스 쇼핑센터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습니다. 1년에 한두 번 정도 한국에 있는 가족 중 부모님의 생신이 다가오면 쇼핑몰에 들러 비교적 부담이 덜한 스카프, 장갑, 셔츠 등을 사서 보내곤 했습니다. 모바일 게임광고를 편집하는 재택근무를 하고, 일을 마치면 바로 옆에 매달려있는 섬유입체를 주물 대다 보면 무심히 하루가 지날 때가 대다수다 보니 며칠씩 집에만 머물 때가 있었습니다. 의자에 달라붙은 엉덩이, 엉덩이 살에 붙은 속옷, 엉덩이 골을 중심으로 서로 달라붙은 피부를 순서대로 떼어내고 삐걱이는 나무문을 열어 집을 나섰습니다. 분명 하루를 시작한 지 몇 시간 안 되었지만 게으름덕에 해는 벌써 지고 있었고, 노을이 섞인 캘리포니아의 태양빛은 눈을 똑바로 뜨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낮, 밤, 새벽을 분간할 수 없는 집에서 나오면 쏟아지는 볕을 통해 온기가 전해졌고, 굳이 틀지 않아도 머릿속에서는 늘 Eagles의 <Hotel California>가 흘러나왔습니다. 금세 도착한 초대형 쇼핑몰은 지상 주차장의 비탈길에서 덜덜거리는 중고차를 살짝 일으켜 세웠고, 한국과는 달리 잘하면 경차 두대도 주차가 될 만큼 널찍한 공간에 차를 세우고 건물 내부로 들어갔습니다.
땅덩이가 넓은 나라여서인지 에스컬레이터도 평소에 기억하던 것의 두세 배 정도의 구간을 한 층으로 묶어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서너 번 오르고 또 오르면 가뜩이나 청량하고 건조한 공기는 인공향과 함께 더욱 쾌적해지고 고깃기름이 스민 누리끼리한 벽지 같던 노을빛을 지워내는 형광조명이 쇼핑몰 구석구석을 새하얗게 밝혔습니다. 다행히 엘에이는 의도적으로 벌거벗는 일만 아니면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고, 저는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이곳저곳을 누볐습니다. 매번 비슷한 선물을 고를 것이 뻔하지만 괜히 더 나은 것이 없나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저는 핫핑크와 검정이 무한히 교차하는 한 상점 앞에서 코가 저리는 향수냄새와 함께 멈춰 섰습니다.
간판에서 소개된 Secret은 웬 비밀인지 말 수 없지만 내밀한 사정 때문만은 아니라도 화려한 인테리어와 반투명 레이스들에 눈길이 사로잡혀 실내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과감한 스타일과 색상에도 다양한 연령의 여성들과 선물을 찾는 남성들로 속옷 가게는 꽤나 붐볐고, 저는 그리도 멋진 색조합과 소비를 하는 사람들의 여유에 타지살이로 조여있던 마음이 다소 느슨해지는 듯했습니다.
<그녀의 진짜 비밀: 하나 됨> 228 x 215 x 40 cm, 나일론 & 폴리에스터 섬유, 아크릴물감과 18k 금박 2018
미술관은 제게 난감했고 솔직히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고 다리가 아팠습니다. 중고등학교무렵 대략의 시험 문제수보다 한두 번 더 강조되고 밑줄쳐진 교과서의 글 중에는 1940년대부터 시작한 미국 추상회화에 대한 묘사가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Jakson Pollock은 패널을 바닥에 눕혀서 뭘 뿌렸다고, Mark Rothco는 보는 사람이 환상을 체험하듯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그리고 Barnett Newman의 숭고한 수직선은 종교적 체험을 느끼게 된다는 주석에 '내가 잘 모르지만 그런가 보지' 하는 셈으로 읽어 내려간 기억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렇게 무심하게 미술교과서를 덮은 지 십여 년이 흐른 후머리속에서 뒤엉켜있던 이미지 조각들이 아주 느릿하게 자리를 찾아갔습니다. 저는 떠난 이모를 어렴풋이 그리며 먹던 M&N과 자유투 라인에서 하늘을 날던 마이클 조던, 찬송가 노래와 기도하는 손들이 모여 지어진 뾰족한 교회들, 간신히 오른 비행기에서 황홀히 떠있던 태평양 상공과 쏟아지는 조명빛의 쇼핑센터, 그리고 형광빛 레이스와 옷감으로 가득한 속옷 상점이 오래된 영사기의 필름 조각들처럼 빠르게 회전하며 부옇게 겹쳐지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녀의 진짜 비밀: 하나 됨> 상세촬영 이미지
빼곡한 실줄을 공중에 쌓아나가고 입김으로 흔들며 그 뜻을 되새깁니다. 풍요로웠기에 맘의 여유를 낼 수 있었고, 그 넓은 이해심으로 박애와 정의를 좇을 수 있었던 제1 국가의 권위. 그리고 그를 동경해 꾸역꾸역 국경을 통과한, 어딜가나 겉도는, 저의 모습이 어스름히 맞닿아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