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탄생> 240 x 330 x 45 cm, 나일론 & 폴리에스터 섬유, 레이스, 비즈 아크릴물감과 18k 금박 2021
혼자 미국생활을 시작하고 1년 즈음 지날 무렵, 부모님 연배 지인분들의 식사자리에 초대된 적이 있었습니다. 두어 분은 자주 뵈었지만 지인분의 지인들이 도착하기 시작하자 인사와 함께 소개를 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낯선 사람들이 가득 모여 서로 상투적인 안부를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즐겁고도 어색한 복잡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느닷없는 고성이 모임의 온기를 박살 냈습니다.
"아니, 형님! 저도 이제 환갑이에요! 이 새끼라뇨!"
말다툼의 시작은 '60이 지나도 너는 내 밑이야'라는 식의, 연배가 지긋한 아저씨들의, 반복되는 서열정리에서 비롯됐습니다. 온갖 멸칭 폭격을 당하던 '후배'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처참했던 기분을 큰 소리로 털어내며 일행들 앞에서 용기 있게 수모를 뿌리쳤습니다.
"야 이 새끼야, 네가 환갑이 지났으면 나는 70이 지났어, 이 새끼야!"
매 끼니의 영양이 좋아서인지 육칠십이 지난 아저씨들은 지칠 줄 모르며 고래고래 목청을 높였고, 결국 몇 년 늦게 태어난 죄로 반격을 시작한 어르신은 무안한 입맛만 다시고 모두와 함께 식전 감사기도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무념무상 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풍겨오는 바비큐 냄새 틈바구니 새어 나오기 직전의 웃음기를 입술과 함께 앞니로 물었습니다.
"아이구우, 애가 애를 낳았구먼! 깔깔깔-"
이제 60대는 경로당에 그림자도 스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고, 족히 팔십은 건너가야 적절한 형님 대접이 시작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80대의 눈에 70은 아직이고, 70대의 눈에 회갑은 그저 시퍼런 청춘이겠지요. 그리고 끝없는 '어린놈들 랠리'의 저만치 새카만 끝에 이제 30대 초보 아빠, 엄마는 그저 '핏덩이를 안고 있는 애'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은 지당한 듯합니다.
<스튜디오투어 비디오> 싱글채널 비디오, 6분 2021
엄마가 아기를 낳은 것이 사실이지만 아기도 엄마를 만듭니다. 수시로 깨어나서 배고픔과 젖은 기저귀의 축축함에 대해 칭얼대는 아이를 위해서 양수며 피며 어마어마하게 쏟아낸 취약한 몸을 일으키는 여자를 생각해 봅니다. 여느 연예인처럼 몇 달 만에 처녀 적 몸매로 돌아가는 것은 말도 안 되고, 부어오른 손마디와 몸을 보면 새순처럼 하늘거리던 옛 모습은 거짓말처럼 사진에 남아 정말 그랬었는지 아니면 포토샵의 소행인지 의문점만 남깁니다.
익숙한 엄마의 몸속에서 때가 되니 머리를 비집어 밀며 세상밖으로 나온 아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출산 전에는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보송보송한 포대기에 감싸진 아이를 건네받고 다소 피로해 보이는 (하지만 투명 메이크업으로 여전히 단정한 외모의) 산모와 감격스러운 미소를 짓는 상황을 떠올리곤 했지요. 하지만 실상은 땀과 눈물이 아내의 얇은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비벼놓았고 피범벅이 된 의료용 침대 커버 위에서 몇십 분을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쥐어짜 내는 소리와 함께 안절부절못했습니다. 머릿속에는 '이래도 괜찮은 건가?'라는 의문만 연신 솟구쳤고, 진이 빠져 다리가 풀릴 때 즈음 콩돌이는 엄마 몸에서 온전히 빠져나와 우렁찬 소리로 앙알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새벽녘부터 시작된 산통으로 아내의 얼굴은 퀭했지만 꼬물대는 작은 아이를 뱃속에서 꺼내 가슴 위로 올린 모습은 성스러웠고 제 인생에서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장벽을 뚫고 나온 선지자의 품위도 어려있었습니다.
<스튜디오투어 비디오> 싱글채널 비디오, 6분 2021
출산 전후로 콩돌이 엄마의 옷과 행동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모든 산모들이 그렇듯 크고 여유 있는, 너풀대는 원피스만이 일상을 견뎌낼 수 있게 해 주었고 아이가 양수주머니 안에서 느끼던 리듬에 맘이 편하도록 잔잔한 물결을 흉내 내어 무릎을 오르내리고 콩돌이를 얹은 팔을 느릿느릿 흔들었습니다. 옷과 몸짓은 물과 일렁이는 파도처럼 거친 세상사에 움츠러든 마음을 바다처럼 넓혀갔고 자기 자신밖에 생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핏덩이를 위해 모든 정황을 헤아리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자신을, 뜻을 실었던 일과 같이 지워나가자 어두컴컴한 아파트 거실 그림자와 같은 우울이 마음에 잔뜩 끼어갔습니다. 아기의 작은 울음소리와 낯선 배변 색깔에도 콩돌이 엄마의 심장은 철렁댔고 그녀는 밖에 나간 콩돌이 아빠가 빨리 돌아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불안, 우울, 무기력 따위를 아이의 애교로 간신히 누르던 날들이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중국에서 시작됐다는 소식이 뉴스를 통해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스튜디오투어 비디오> 싱글채널 비디오, 6분 2020
"나... 한국에 가고 싶어. 이제 여기가 너무 힘들어."
아내는 어려서 주머니에 넣어 다니던 유리구슬 같은 눈물을 떨궜고, 저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투의 설득과 비난을 이어갔습니다. 중국 전역으로 번져가던 호흡기 질환은 엘에이에 도착한 국제 항공선을 통해 저희 주변 지역에도 첫 감염자를 발생시켰고, 끔찍한 괴담과 생각조차 하기 싫은 엄청난 치료비에 대한 풍문이 각종 매체를 떠돌았습니다.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아이의 정기 검진을 제외하면, 병원에 갈 일이 드물었지만 '행여나'하는 상황이 찾아들까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코로나에 대한 이야기는 점점 심각해졌고, 상점에는 마스크는커녕 휴지와 손 세정제 따위도 동이 났습니다. 사람들은 극도로 민감해졌고 모두가 집에서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기다렸지만 도무지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말을 반복했고 저도 진작 그를 알고 있었습니다.
영화 <미나리>를 보며 폭풍우에 흔들리는 컨테이너에서 가족을 재우며 어떻게든 정착을 해내려 몸부림치는 이민 1세대 아버지의 간절함을 이해했습니다. 저 역시도 그가 강렬히 저항하듯 어깨 처진 모습으로 고향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저와 아내는 수시로 다투고 아이를 예뻐하며 새로운 일상을 치러 갔고, 간신히 반셔터 내린 금은방에서 구해온 돌반지를 아이에게 끼워 집안의 그나마 가장 넓은 벽을 배경으로 콩돌이의 백일사진을 찍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