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이 되고 이윽고 어려서 지내던 아파트의 재건축이 끝났습니다. 재건축이 한창이던 시기, 콩돌이 아빠는 자신만의 첫 번째 방을 갖게 된다는 부푼 꿈에 설레며 틈만 나면 견본책자의 조감도를 들추어보았습니다. 집 공간 중 화장실 다음으로 아담하지만 다부지고 네모 반듯한 모습을 보며, 비록 형으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이 대부분일지라도, 벽과 바닥을 어떻게 활용하고 소지품을 진열할지를 상상하며 입주일을 기다렸습니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장소가 생기고 이를 알뜰히 꾸며나가는 것은 스스로의 내부를 뒤집어 형태를 다듬는 과정 같다고 느낍니다. 일정 구간을 나누고, 색을 활용하면서 부분을 차지해 나갈 물건을 선택하는 일은 무의미한 반복일 수 있지만 당사자에게 더할 나위 없는 활기를 줍니다.
저는 대학을 가기 위해서 입시 미술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제가 그리는 (지금 보면 참 쑥스럽고 어설픈) 그림 외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미술관을 찾는 일은 드물었고, 이에 학교나 식당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건축물에서 느껴지는 환경은 무척 낯설었습니다. 창문 없이 우직하게 뻗어나가는 벽면과 발소리가 조심스러운 고급 나무소재의 바닥은 '우아하다'는 감흥을 '빨리 나가고 싶다'는 불안으로 밀어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2018년 저의 첫 개인전이 계획되고 제게 주어진 자리를 확인하자 20년 전 신축 아파트의 견본책자를 만지작대며 작고 귀여운 방에 어떻게 내 것들을 놓을지 설레하던 마음과 미술을 대하기 어려워했던 20대 초중반의 어색함이 멋쩍게 손 내밀어 악수를 하는 듯했습니다.
미국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치른 지 4년이 지나고 한국에서의 가슴 뭉클한 개인전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즐거웠던 점은 전시가 이뤄지기 1년 전 즘 우연히 미술관 전시방문을 했었고, 천장이 높고 공간이 널찍한 5 전시실에 마음을 홀딱 빼앗겼는데 바로 그곳에 그간 만들어온 것들을 매달고 벽에 걸게 된 것입니다. 전시가 확정되던 날, 1년 뒤 미술관에서 울려 퍼질 감탄사가 벌써부터 들려오는 듯했고 저는 매번의 전시기회마다 야금야금 몸집을 불려 오던 야심을 또 한 번 키웠습니다.
'가장 크고 멋지게.'
<공중드로잉: 구형의 구 no.2> 지름 152cm, 나일론 & 폴리에스터 실, 아크릴물감과 18k 금박 2018
2018년, <그녀의 진짜 비밀> 이 전에 <공중드로잉> 시리즈를 이어가면서 섬유로 만든 구형의 입체가 있습니다. 약 150cm 지름의 구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수직의 공중 나일론 실에 폴리에스터 실을 수평 방향으로 엮어가며 한 레이어씩 넓혀가는 공정은 정말 손이 많이 갔습니다. 무려 세 달간 하루 10시간 내외가량 제작에 몰두하면 간신히 끝낼 수 있던 초기 모델은 단순 반복적인 노동으로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지만 몸은 늘 녹초가 되곤 했습니다. 서울에서의 전시는 이 <구형의 구>를 기반으로 <깨진물>이라는 대형 작업을 기획하였습니다.
미술관의 천정은 3.4미터이고 중앙 가벽을 고려했을 때 2,5미터 이상의 입방체 3점이 준비되면 전시장을 무난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기회를 얻기 위해 제 능력 밖의 상황을 말로 과장해 나갔고, 덕분에 기존의 완성품보다 거진 두 배 더 큰, 작업실을 가득 채운,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학창 시절 수행평가를 하면서 손으로 발표자료를 준비하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지금은 흔한 프로젝션이나 대형 화면이 귀했던 당시, 문방구에서 전지 몇 장을 구매해 가장 넓고 깨끗한 거실 바닥에 두어 장을 이어 붙였습니다. 그리고 짧고 굵은 마커의 지독한 알코올 냄새를 맡으며 학급원 모두가 볼 수 있는 크기의 글씨를 써 나가던 고통스러운 추억이 생각납니다. 크기를 키운다는 것은 머릿속에서 행복회로를 돌려 '똑같은 양식을 몸집만 키우는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무참히 깨부숩니다. 재료를 바꾸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 그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부품 간의 연결, 그리고 변형 방지등의 시행착오를 겪어내야 합니다. <깨진물>의 경우에도 기존에 즐겨 쓰던 기성품 캔버스 틀을 사용할 수 없었고, 해당 패널의 면적을 감쌀 수 있는 천은 구하기 어려웠기에 '이어 붙이는' 작업을 시도해야 했습니다.
힘을 잔뜩 주어 출입문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맞닿은 철판이 섬뜩한 소리를 내는 작업장으로 들어섰습니다. 아무리 시간을 보내도 익숙해지지 않는 배기관 소음이 울려 퍼지는 지하 1.5층에서 목재를 조립하고 천을 잡아당겨 실의 구조를 위에서 아래방향으로 늘어뜨릴 수 있는 기초 패널을 만들어 갔습니다. 단지 두 배정도 크기만 키웠을 뿐인데 생각지도 못한 실수가 연속됐습니다.
길이가 늘어난 목재는 휘어지고, 전시장 벽면색에 맞추기 위해 물감칠을 한 캔버스 천은 딱딱하게 굳어 주름을 펼 수가 없었습니다. 천을 바꾸고, 목재를 보강하는 작업 후 땅방향으로 내려오는 나일론 줄을 고정하기 위해 사용한 접착제가 천에 흉측한 무늬를 남기자 저는 다시 2주 넘는 작업을 중단하고 그를 분해하여 폐기했습니다. 다행히 세 번째 시도한 패널은 무사히 완성되었지만 두 번이 넘는 시행착오로 4달을 소모해 버렸습니다. '파스스- 파스스-' 침이 마르고 속이 타들어 갔습니다.
어디에 있던 무엇을 하던 매캐한 공기의 지하 작업실이 제 몸을 끌어당겼습니다. 간신히 짬을 내어 가족과 시간을 보낼 때에도 그랬고, 온몸이 아파 집 벽에 몸을 기대어 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콩돌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할머니께 부탁드리고, 밤이 찾아와 재우고 나서, 저의 전용 씽씽이를 타고 지하실로 미끄러져 내려갔습니다. 다른 어떤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작업만 할 수 있는 밤 11시부터 동틀 무렵까지, 상가의 환기장치가 꺼져 더 이상 배기관 소음이 들리지 않는 지하실은 무서웠지만 그 시간을 버텨내야 했습니다. 급한 마음에 식사는 대부분 라면과 같은 인스턴트식품을 작업장에서 먹었고 국물, 부스러기 따위를 바닥에 널브러뜨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