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물> 220 x 220 x 330 cm, 나일론 & 폴리에스터 실, 봉돌, 메니큐어 2022
"콩돌이 아빠, 군대 안 다녀왔어요?"
"으-으-, 저는 후임들이 다 해줬어요."
땅콩버터 냄새의 유혹에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을 한 쥐돌이는 끈끈이에 온몸이 달라붙어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간 맘고생이 끝났다는 생각에 한시름 놓은 저는 '이제 이 녀석을 어쩌지?'라는 새로운 고민을 떠안았습니다. 창고 임대를 시작할 때 쥐와 벌레의 유무를 물었던 기억을 더듬어 '전혀 없다'는 호언장담을 하던 위층 실내골프장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고, 시시비비를 따지며 쥐의 처리를 부탁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유약한 쥐돌이는 골프장 사장님의 나무막대 스윙에 속담에서만 듣던 '찍소리'를 내뱉고 작업실을 떠났습니다. 쥐돌이는 마치 <은비 까비>의 전래동화같이 '게으르고 더럽게 살지 말라'는 보편교훈을 남기고 그의 짧은 일탈을 마쳤습니다. 행여 망가뜨릴까 노심초사하던 실 구조물은 감사히도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온전히 상태유지를 해주었습니다.
* Rest in Peace, Jwi-dol.
<양수 터진 날> 13 x 22 cm, DMV 종이에 쥐 펜과 수채 2022
<깨진물>이라는 제목은 해당 작업이 중반을 넘길 무렵 마음속에 찾아들었습니다.
"아아니, 애니웨이 그러니까, 그때! 하이웨이에서 레인체인지를 하면서 달리는데, 폴리스가 갑자기 '풀오버 숄더'하라고-. 그으러고는 올오브어 써든 하아트어택이 와서 나인원원을 이머전씨로 부르니까, 이알로 가는 길에 엠뷸런스에서 씨피알을 해가지고 웨이크업 했다잖아, 글쎄."
'나는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던 다짐과는 다르게 저도 미국생활이 익숙해지자 형용사-명사-동사의 순으로 한국말의 부분이 영어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귀국을 해 지인을 만날 때면 F나 R발음을 무심코 현지에서처럼 소리 내었고 '재수 없다' 나 '미국 물 좀 먹었냐'는 비아냥에 시달리곤 했습니다. 나아가서 영단어를 한국어에 섞어 쓰면 가까운 지간에서는 경멸의 눈초리도 받곤 했는데, 구차한 변명을 하자면 정말 해당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영어와 한국어를 적절히 섞어가며 새로운 언어의 갈래를 만들어가던 이민자들의 애환을 이해하게 되었지요.
'양수가 터지다'라는 표현은 'Water break'라 배웠습니다. 콩돌이엄마는 5월 중후순경 출산예정일을 받은 상태였고, 저는 출산예정일의 한참 전이던 아내의 생일을 소박한 케이크와 함께 축하하고 있었습니다.
"왠지 콩돌이랑 내 생일이 겹칠 것 같은데..."
콩돌이는 엄마의 생일을 같이 축하하고 싶었는지 예정일보다 서둘러 세상으로 나오려는 신호를 주고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생일파티보다는 유유자적한 휴식을 훨씬 선호하지만 당시의 아내는 온 가족의 관심이 집중되는 아기의 생일에 자신의 것이 덮이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콩돌아, 조금만 이따가..."
아내의 생일 12시 자정이 '째깍' 소리와 함께 지나자 물(Water)이 깨졌(Break)습니다. 아내는 다리사이로 흐른 양수를 보이며 병원행을 부탁했습니다. 효자 콩돌이는 태아일 때부터 모친의 맘을 헤아려 엄마의 생일 하루 건너 세상문을 두드렸고, 우리 세 가족은 모두가 잠든 시간에 차에 올랐습니다. 어슴푸레한 새벽, 새들이 지저귀며 동이 터오던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은 마치 바닷물 속 같은 시퍼런 빛에 잠겨있었습니다.
"Hi, my wife's water just broke, her due is in about a week though." - 저기, 저희 아내 양수가 방금 터졌습니다. 예정일은 일주일정도 후인데 말입니다.
20대 후반부터 어렵게 시작한 영어는 관공서, 진료, 전화 등의 사용처에서 꾸준히 애를 먹였습니다. 하지만 긴박함은 뻔뻔함을 안겨주었고, 일단 되는대로 의미전달을 하며 아내의 입원수속을 밟아나갔습니다. 8년의 미국생활동안 그림자조차 스치지 않던 병원에 발을 들였고, 묘한 2000년대 레트로풍 분만실에서 아내는 양수가 터진 후 13시간의 진통을 치렀습니다. 오직 둘 뿐이던 우리는 함께 온 힘을 다해 아이를 세상밖으로 밀어냈고 드디어 콩돌이가 양수와 피를 뒤집어쓰고 울어댔습니다.
<깨진물> 부분 확대: 바닥 2022
저희 엄마는 콩돌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유아용품을 국제우편에 실어 보냈습니다. '삼촌'과 '아빠'는 큰 차이가 있어서, 집중해서 관찰하지 않던 아기 신발, 배넷저고리등을 빤히 바라보게끔 했습니다. 저는 그리 작은 물건에 사람의 몸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문득 아파트 출입구에 나뒹굴던 제 낡은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노안이 있는 어른은 자신의 손위에 있어도 제대로 볼 수 없는 겨자 씨앗이 굵은 나무가 되듯, 손바닥에 꼭 쥐어 감출 법한 아기 신발, 장갑 따위가 속절없이 자라나 제 것과 같이 커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뭉툭한 제 손재주를 자상히 이해해 주던 실을 써서 쏟아져내리는 물의 형태를 만들고, 반짝임을 얹기 위해 UV라이트로 굳힐 수 있는 젤네일을 칠해 이슬방울을 맺었습니다. 땅으로 흘러내리는 선을 공중에 엮어가며 층을 이루었고, 얇은 줄로 부피를 키운 형태의 끝에는 콩돌이의 장난감을 매달았습니다.
"아빠! 저거 내 빠방이야!"
"아빠가, 전시 끝나면 이거 돌려줄게."
<깨진물> 부분 확대: 미니어쳐와 매니큐어 2022
실 구조의 바닥에는 씨앗같이 작은 양말, 책상, 물컵, 젖병 따위를 100여 개 만들어 흩뿌렸습니다. (원래 산달 x 30일 = 300개를 만드려 했지만 너무 지쳐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알같이 바닥에 놓인 미니어처들은 사람들의 무릎을 꿇리거나 무심코 지나치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