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아래

작업실 노트

by 콩돌이 아빠
<땅 아래> 종이에 연필과 잉크

상경하신 부모님이 바쁘게 생활하며 나와 형을 키우던 동네는 비슷한 형편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작은 시민아파트에 식구 여럿이 몸을 밀착하고 지내야했고, 단칸방, 반지하 사는 친구들도 부지기수였다.


불철주야 일해온 부모님 덕을 보아 살림이 나아지고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공간도 서서히 늘어났다. 그래도 맘에 선명히 기억나는 장면들이 있다. 친구를 불러내려 땅에 얼굴을 붙여 이름을 외치던 모습, 상가나 학원이 지하에 있어서 계단을 들어설 때 콧구멍으로 스며들던 정체 모를 습기의 향 같은 것 말이다. 추억이 포장되었는지 몰라도 그 끈적하고 말소리가 울려 퍼지던 땅 아래의 사람들은 활기찼고 '꿈'이라는 것을 두 손에 꼭 쥐고 하루에 몇 센티씩 땅 위로 오르고 있었다.


레지던시와 집에서 작업하던 때를 제하고 내가 전시를 준비하는 공간은 지하이다. 살인적인 미국의 임대료 때문에 분리된 작업실을 꿈꿀 수 없던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 가장 넓되 싼 공간을 찾아보았다. 그렇게 첫 번째로 얻은 지하주차장은 소음을 넘은 굉음이 울려 퍼지는 삭막한 공간이었는데, 새벽에는 너무 무서워서 그 굉음마저 사라진 고요함에 수없이 소름이 돋곤 했다. 간신히 그곳을 탈출하려고 계획을 세워도 엄두가 나질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인터넷을 통해 공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물색하다가 주변시세보다 상대적으로 넓은 매물을 찾았다. 어쩔 수 없이 지하로 향했지만 이사 전에 사용하던 지하주차장을 떠올리면 천국 같았다. 그런데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여름 초입에 들어서자 벽에 기분 나쁜 물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 만에 벽과 천장에서는 결로가 흘러 떨어졌고, 내 소중한 목재와 캔버스 천에 곰팡이가 피어올랐다.

<무제> 종이에 색연필, 연필, 수채와 18k 금박

아내가 흥분과 좌절을 동시에 토로하는 날 진정시키고 공장용 제습기를 사주었다. 걷잡을 수 없는 결로를 보고 "작은 여행용 캐리어만 한 기계가 뭘 할 수 있겠냐"며 비관적으로 툴툴거리는 내 마음까지 빨아들이듯 제습기는 지하실 온 공간과 내 콧속까지 말려 붙였다. 축축했던 지하에 약수통 한가득 담은 정도의 양의 제습기 물을 하수구에 붓자 평화가 찾아왔다. 어려서 당연히 여겼던 아늑하고 깨끗한 공간의 기억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노고로 차려진 일시적인 상태였는지 새삼 깨닫는다.


대작가 문신은 자신을 반기지 않던 고국에서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작품의 절정기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인생 말년에 돌아온 고향 마산에 넓은 부지를 매입하고 그곳을 조금씩 자신의 작품과 번듯한 작업공간으로 채워나갔다. 내가 어려서 고개가 꺾어지게 올려보던 올림픽 공원의 쌓여 올려진 스테인리스 공들의 정체는 30년이 훌쩍 지나 문신작가의 것으로 알게 되었다.


나 역시 아주 조금씩이라도 땅 위로 내 몸과 작업이 번져 오르면 좋겠다. 이끼처럼, 들풀처럼 번지고 벽을 타고 올라 얼마만의 땅이라도 자리 잡아 햇볕에 모습이 드리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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