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단풍’이 불타오르는 가을 산에 대한 예찬인 것 같은데 난 산이 아닌 인천 강화 ‘석모도 바람길’에서 ‘황홀한 유화’를 감상했다. 함께 간 마이힐링로드 회원들에겐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을 테다.
온통 붉거나 은빛으로 빛나는 광활한 갯벌을 보며 ‘바다 단풍’도 쾌 매혹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마힐로가 11일 석모도 바람길을 걸었다. 이날 ‘비 예보’와 ‘흐림’이 수시로 바뀌는 기상청의 변덕스러운 일기예보에 신경이 곤두섰지만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은빛’과 ‘붉은빛’ 갯벌에 몰입돼 불필요한 상념은 저만치 달아났다.
석포리 선착장에서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으로 마애석불좌상이 유명한 보문사까지 석모도 바람길을 풀코스로 걸으려면 16.5㎞, 5시간 정도 걸린다. 하지만 마힐로는 9km로 코스를 조정해 민머루 해변을 들머리로 삼아 나룻부리항 시장까지 걸었다.
석모도는 전날까지 기상청 사이트에 '약한 비'예보가 떴으나 출발 당일 새벽엔 '흐림'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막상 민머루 해변에 도착하니 비가 쏟아졌다. 그것도 '강한 비'였다. 기상청이라고 하늘의 변덕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긴 어렵겠지만 예보를 믿고 길을 나선 우리 일행은 당황스러웠다.
비를 맞으며 민머루 해변에서 보잘것없는 야산을 넘어 석포리 쪽으로 바닷길을 걷는 도중 비가 멈추면서 해변 쪽으로 한 폭의 진경 ‘수묵화’와 같은 풍경을 선사했다. 하늘도 미안했던가 보다.
비가 그친 뒤 칠게, 농게, 갯게가 휘젓고 다니는 펄갯벌은 은빛으로 빛나고 바다와 하늘은 운무가 부유하듯 떠있어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의 한 대목을 연상시키는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가벼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시인’이라면 ‘시상(詩想)이 떠오를듯한 진한 감성을 뿜어내는 갯벌이다. 내륙 지방에서 새벽같이 달려온 우리 일행에겐 무척 생경하고 아름다운 그림이다.
하지만 ‘바람길’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다. 바닷길로 나룻부리항까지 4km를 더 걸어가면 만나는 시월이 가장 예쁜 석모도 칠면초 군락이다. 비싼 붉은 물감을 아낌없이 뿌린듯한 갯벌은 구름이 잔뜩 낀 회색 하늘과 극적인 대조를 보였다.
칠면초는 해안선을 따라 모래언덕이나 갯벌에 서식하는 염생식물이다. 봄과 여름엔 초록빛을 띠다가 가을을 거치면서 엽록체가 사라져 제 빛깔인 붉은색을 드러낸 뒤 차츰 자줏빛으로 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을의 칠면초를 ‘바다의 단풍’이라고 부른다.
마힐로가 이곳에 도착했을 땐 바다가 아주 멀리 물러난 썰물 때지만 하필 전날 비가 온종일 내려 발이 푹푹 빠질 만큼 진창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칠면초 군락으로 걸어갈 엄두도 못 내고 바다를 향해 길게 뻗은 돌출 데크에서 '붉은 갯벌'을 내려다봤다.
주중 내내 날씨가 좋았다면 회원들은 갯벌이 단단하게 마른 칠면초 군락지의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걸으며 색다른 ‘낭만’에 젖어들었을 터다. 물론 붉은 갯벌 속에서 온갖 포즈의 ‘인생샷’은 덤이지만.
이 길을 걸으며 왜 ‘바람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알았다. 이맘때쯤이면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부드럽고 적당한 바람이 먼바다에서 끊임없이 분다. 나그네는 그 바람을 맞으며 모노톤 은빛 갯벌과 파스텔톤 붉은빛 갯벌을 번갈아가며 만난다.
그래서 이 길은 다른 어느 계절보다도 하늘이 우중충하고 바람이 부는 가을날에 걸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배우 김진아가 버버리 코트 옷깃을 여밀며 등장해 '바람맞았어요'라는 멘트를 날린 모 화장품의 전설적인 CF 장면처럼 고즈넉한 가을 석모도 바람길은 빛바랜 사진을 보는 듯 지난 시간을 뒤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