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이 뚜렷한 대한민국에서 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고장을 꼽으라면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전남 구례다. 시의 한 대목처럼 봄은 때가 되면 기다리지 않아도,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어디든 찾아오지만 ‘구례의 봄’은 특별하다.
법정 스님은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었기 때문에 봄이 온 것이다'라는 말을 했지만 구례는 이 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고장이다. 구례의 봄을 알리는 3종 세트는 흑매화, 산수유, 벚꽃이다.
3월 하순이 되면 구례읍 하천변에는 수십 km에 걸쳐 벚꽃길이 이어지고 산동면에는 산수유가 온 천지에 노란 빛깔을 뿜어낸다. 지리산 자락 ‘화대종주’ 들머리인 화암사엔 300여 년간 비바람을 맞으며 질곡(桎梏)의 역사를 굽어본 흑매화가 고풍스런 사찰을 붉다 못해 검붉게 물들인다. 그래서 이즈음 구례를 찾은 탐방객들은 ‘아찔한 꽃멀미’를 일으킨다.
트레킹카페 마이힐링로드는 절정에 이른 ‘화엄매’를 감상할 겸 ‘봄의 절집’ 화엄사에서 시작하는 치유의 숲길을 걸었다. 청량한 계곡과 사철 푸른 대나무숲이 우거진 운치 있는 숲길을 거쳐 연기암 등 6개 암자를 순례하는 원점회귀형 코스로 쾌청한 봄날에 걷기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치유의 숲길은 화엄사에서 연기암으로 올라가는 2.2km의 계곡 숲길과 5개의 암자를 거쳐 화엄사로 내려오는 임도길 3.9km로 나눠진다. 대략 6km로 거리나 난이도로 볼 때 '산책길'이라고 할 수 있다.
계곡을 끼고 오르는 완만한 오르막은 유난히 대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어 제법 운치가 넘친다. 이마에 땀이 살짝 맺힐 때쯤 연기암 바로 아래 산중 카페 삼거리에 도착한다. 연기암은 문수전, 관음전, 적멸당, 원응당 등을 갖춰 암자라고 부르기엔 규모가 작지 않다. 이 절엔 국내 최대의 문수보살상과 함께 티베트 불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니차가 시선을 끈다.
금빛 마니차 주변엔 홍매화와 노란 털방울같은 생강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문수보살상앞에선 운해도 볼 수 있다는데 이날은 구례읍과 와산 사이로 잔잔히 흐르는 섬진강만 보였다.
연기암에서 시작해 청계암~보적암~미타암~내원암~금정암~지장암으로 이어지는 암자 순례길은 임도라고 하지만 울창한 숲에 길이 나있어 오솔길을 걷는 기분이다. 쭉쭉 뻗은 키 큰 나무들이 햇볕을 가리고 길은 바람이 순환돼 쾌적하다. 한여름에도 시원할 것 같다.
트레킹의 대미를 장식한 화엄사엔 이날 상춘객들로 차고 넘쳤다. 적막할 만큼 사람의 발길이 뜸한 치유의 숲길과 비교된다. 이때쯤 만개한 각황전 오른편의 ‘화엄매’를 알현(謁見) 하기 위해서인데 대부분 상춘객들은 흑매화에 눈도장을 찍은 뒤 절만 둘러보고 돌아간다.
'화엄매'는 단박에 시선을 끈다. 사찰 처마를 배경으로 휘감아도는 줄기와 유연한 가지에 달린 선홍빛 꽃잎은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조화를 이뤄 처연할 만큼 아름답다. 그래서 높이 9m의 홍매(紅梅)는 지리산의 봄을 상징하는 ‘나무의 여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도 화엄사를 찾은 상춘객들은 매년 이맘때쯤이면 화엄매 앓이를 할지도 모르겠다.
지인 한 분은 화암사를 여섯 번 왔지만 만개한 흑매화를 본 것은 처음이라며 기뻐했다. 또 한 분은 불과 1주일 전에 가족들과 화엄사를 방문해 고혹(蠱惑) 적인 화엄매를 보고도 또 왔다. 치유의 숲길을 화엄사 밖 길상암 대나무숲에 있는 역시 천연기념물인 들매(白梅)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란다.
들매도 좋았지만 300여 년 풍상을 이겨낸 '화엄매' 의 힘이 경이로웠다. 번잡하고 혼탁한 세상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다면 구례 화엄사 치유의 숲길이다. 흑매화와 들매가 절정인 3월 하순이면 더욱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