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하고 처연한 계곡

경남 함양 지리산 칠선계곡 가는 길

by 박상준

경남 함양의 지리산 칠선계곡은 ‘불친절한 계곡’이다. 도도하고 콧대가 높다. 중국 고전 수호지에 나오는 ‘양산박’ 같은 산적들의 소굴을 지리산에서 찾는다면 아마도 칠선계곡이 가장 유력한 후보였을 터다.

계곡 입구부터 천혜의 요새처럼 가파른 깔딱 고개를 넘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무엇보다 골이 깊고 험한 데다 그나마 비선대까지만 산행객들의 출입을 허락하고 있다.


비선대부터 천왕봉까지 비법정 코스를 가려면 미리 예약해야 한다. 원시림 같은 자연생태를 보호하고 깊이 들어갈수록 ‘죽음의 계곡’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험준하니 어쩔 수 없겠다.

하지만 계곡을 타고 올라갈수록 처연하리만큼 아름다운 풍광이 등장한다. 선녀탕, 옥녀탕, 비소 담이 이럴 진데 칠선폭포, 대륙폭포, 삼층 폭포는 선경이 따로 없다.


(두지터 주막의 담배건조장 풍경)


장마가 잠시 물러가고 폭염이 찾아온 주말에 찾은 칠선계곡은 들머리에 도착하기 전부터 진땀을 흘리게 했다.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3대 계곡으로 꼽히지만 콧대 높은 양갓집 규수처럼 쉽게 ‘속살’을 보이지 않는 계곡이다.

지금이야 경사는 심해도 돌길로 말끔히 정비해 놓았지만 옛날엔 숲이 울창한 고갯마루에서 계곡 입구인 두지터 마을을 찾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고개를 넘어도 칠선계곡은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고개 정상에 오르니 멀리 우뚝 솟은 지리산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졌다.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얼음 막걸리로 목을 축일 수 있는 두지터에 주막 두 곳이 나온다.

황토로 올린 낡은 담배건조장이 길가에 쓰러질 듯 서있는 것을 보면 예전엔 담배농사를 지은 것 같은데 지금은 등산객들의 쉼터로 알뜰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두지터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는 숲길에 뜬금없이 작은 철문이 가로막는다.

악천후에 등산객들의 출입을 막기 위한 것인데 내 눈엔 선경(仙境)으로 향하는 '비밀의 문'처럼 보였다.

이 문이 활짝 열린 것은 9년 전인 2008년이다. 그 이전엔 10년간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지리산 야생동물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휴식기다.

자연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골이 깊고 험해 바위가 떨어지거나 추락사고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학도병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수많은 청년들이 칠선계곡에 숨어들었던 것은 험준한 지형상 손쉽게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선 주인공 박태영이 1943년 학도병 입대를 피해 지리산에 숨었다가 칠선계곡 인근 벽송사(碧松寺)를 찾는 장면이 나온다.

민족의 애환(哀歡)과 질곡(桎梏)이 스며있는 계곡이 된 것은 이곳이 아무나 범접(犯接)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칠선교)


계곡을 넘는 첫 번째 다리가 칠선교다. 2011년 태풍 무이파에 의해 다리가 일부 파손돼 새로 시공했다. 며칠 내린 비로 풍성한 물줄기는 굉음을 토해 냈다. 다리 건너 전망 좋은 추성 망 바위를 지나면 경사가 심한 산길로 접어든다.

지리산 계곡 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피아골, 뱀사골 계곡은 계곡을 따라 길이 형성됐다. 하지만 칠선계곡은 산길과 계곡길이 떨어졌다 만나길 반복하며 S자형으로 교차한다.


숲 속을 한참 올라가다 보면 오아시스처럼 용소(龍沼)를 만난다. 선녀와 나무꾼 설화 못지않은 전설을 간직한 선녀탕이다. 달빛 아래서 목욕을 마친 선녀들이 옷을 찾아 헤매는 것을 본 사향노루가 자기 뿔에 걸려있던 옷을 가져다주었다. 무사히 하늘나라로 되돌아간 선녀들은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향노루를 칠선계곡에서 살게 해 주었고 곰은 이웃의 국골로 내쫓았다는 이야기다(한국 지명유래집).



에메랄드빛 용소가 비현실적으로 반짝이는 곳이라면 누구라도 선녀의 전설을 떠올릴 것이다. 얼음물처럼 찬 선녀탕에 발을 담그고 앉아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선녀탕을 지나면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옥녀탕이 나오고 벼랑을 오르면 비선담이다.

길은 이어지지만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은 거기까지다. 칠선계곡 탐방예약^가이드제가 도입된 이후 예약을 못하면 갈 수 없다. 그것도 회당 참여인원이 20명으로 제한됐다. 아쉽지만 단풍이 고운 가을에 다시와 칠선폭포와 대륙폭포, 삼층 폭포를 감상하며 천왕봉에 오르기로 했다.


하산 길의 심리적인 거리는 짧다. 대체로 내리막길이기도 하지만 계류가 요란스럽게 들리는 서늘하고 매혹적인 길을 되돌아가는 시간이 금방 지나가기 때문이다.

칠선계곡은 작정하고 깊고 거친 골짜기를 파고 들어가면 선경의 진수(眞髓)를 맛볼 수 있다. 두지터를 거쳐 추성리 마을로 내려오자 바람 한 점 없이 햇볕만 강렬했다. 칠선계곡 안과 밖은 전혀 딴 세상이었다.




*코스 / 두지터 마을~칠선교~선녀탕~옥녀탕~비선담~두지터 마을(왕복 10km)


*tip/ 칠선계곡은 오는 2017년까지 생태계 보호와 오염방지를 위해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돼 5~6월과 9~10월 넉 달간은 탐방예약제를 받아 가이드 동행하에 산행할 수 있다. 다만 출입금지 차단기가 있는 비선담까지는 연중 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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