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아름답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계절에 따라 산의 모습이 달라지는 산도 있다.
순백의 솜이불을 덮은 듯한 매혹적인 설산(雪山)과 가을이면 온 산이 불타오르는 단풍 산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겨울과 여름의 대비가 극명하게 갈라져 겨울은 평범한데 여름은 명산으로 손꼽히는 산이 있다.
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에 걸쳐있는 대야산(해발 931m)은 유독 여름에 인기 있는 명산이다. 명색이 한국의 100대 명산(산림청)에 속하지만 겨울 산행지로는 순위권 밖(103위)이다. 하지만 여름 산행지로는 지리산, 설악산에 이어 3위에 오를 만큼 각광을 받고 있다.
그리고 대야산과 희양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계곡에 천년의 세월을 품은 유서 깊은 계곡이 있다. ‘신선의 놀이터’라고 할 만한 경북 문경 선유동천이다.
(거대한 바위 위로 계류가 흐르는 월영대)
선유동(仙遊洞)이라는 이름을 지은 이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중국 당나라 때 이름을 날린 신라 말 문장가 고은 최치원이다.
심산유곡(深山幽谷)을 즐겨 찾은 최치원은 종종 바위나 계곡에 이름을 붙이고 ‘고은’이라는 자신의 호를 적어 놓았다. 그리고 때론 계곡에서 탁족(濯足)하며 멋진 시도 남겼다.
‘미친 듯 바위 사이를 내달아 산을 울리니
가까이에서도 사람의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구나
항상 시비하는 소리가 귀에 이를까 두려워하여
흘러가는 물로 하여금 온 산을 감싸버렸네 ‘
(동문선 19권, 가야산 독서당을 노래하다)
(선유구곡 옆의 고택이 도보여행자의 발길을 붙잡는다)
권력무상을 느끼고 초야를 떠돌던 최치원은 굉음을 울리는 계류 소리에 세속의 갈등과 잡념을 묻혀 버리고 싶었을 터다.
입추가 막 지났지만 한낮엔 열기가 남은 주말, 천 년 전 최치원이 걸었던 대야산 선유동천 나들길 1, 2코스를 걸었다.
겨울에 뜸하다가 여름에 사람들의 발 길이 잦은 것은 용추계곡 때문이다. 계곡미가 빼어나고 아무리 가물어도 수량이 풍부한 계곡이다. 용추계곡 상류로 올라 갈수록 수려해지는 경관이 마음을 홀린다.
길가 곳곳에 쏟아지는 작은 폭포수의 물보라도 눈길을 잡아끈다. 신라시대 때는 인적이 드문 적막(寂寞) 강산에 물과 돌이 빚어낸 풍광이 세상을 등진 선비들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옛날의 흔적은 새로운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바뀔 때마다 만나게 되는 계곡 암벽에 새긴 ‘각명(刻銘) 밖에 없다. 당시 지식인들은 낙서처럼 암벽에 자신의 글씨로 왔다 갔다는 흔적을 남겼다. 기막힌 풍경을 보면 시상(詩想)이 절로 떠올랐으리라.
대야산 깊은 골짜기는 이젠 문명과 자연이 공존하는 길이 됐다. 들머리엔 현대적 건축미학이 돋보이는 펜션이 들어서고 식당이 성업 중이다. 원치 않아도 세상은 그렇게 변했다. 길도 달라졌다. 편리하게 걷기를 원하는 도보여행객들을 위해 황톳길, 데크로드 길, 숲길, 수변 감상 길이 조성됐다.
그래도 역사의 흔적은 남아있다. 선유구곡의 칠우대, 와룡담, 세심대, 학천정으로 이어진 청정계곡은 깊은 숲과 계류를 덮은 소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하지만 이 길에서 가장 돋보이는 곳은 대야산 자연휴양림에서 무당소~용소 암~용추를 거쳐 월영대에 이르는 길이다.
완만한 오르막길이 이어지지만 전혀 힘들지 않다. 귀청을 때리는 청아한 물소리와 솜씨 좋은 석공이 다듬어 놓은 듯 한 계곡미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계류는 너른 암반을 만나 빼어난 풍광을 뽐내고, 우거진 숲은 계곡과 조화를 이루었다. 이런 길에선 잡념이 들어올 틈이 없다.
선유동천 나들길의 끝은 월영대(月影臺)다. 짙은 그늘이 진 숲 속에서 상쾌한 바람이 분다. 산 정상이 목표인 등산객들도 이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길이 가파른 숲으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
우리는 별이 쏟아지는 맑은 밤이면 보름달이 담겼을 아름다운 용소 주변에서 탁족(濯足)을 했다. 골짜기마다 박힌 우람한 바윗덩어리 사이로 말없이 굽이치며 흘러내리는 옥수(玉水)는 온 산뿐만 아니라 내 마음도 시원스레 감싸 안았다. 싱싱한 자연이 주는 감동이다.
*tip / 선유동천 나들길은 운강 이강년 기념관에서 출발해 국립공원 대야산으로 가는 교차지점까지 편도길 1코스와 교차지점에서 용추계곡으로 거슬러 올라가 월영대까지 왕복길 2코스가 합쳐진 길이다. 걷는 거리는 모두 12km지만 난이도는 높지 않다.